연중 제 23주일
21. 9.5 한강주임
+ 찬미예수님 (눈먼 소경의 치유)
인간의 구원을 향한 새로운 역사, 복음은 2천년 전 시작되었습니다. 개별적으로는 우리 모두 아직 그 도상에 있지만,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할 새로운 삶의 기준들을 남김없이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가 무엇을 찾고 있다면, 그에 앞서 우리가 믿었던 바들, 복음과 새로운 가르침의 근본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고 있는지를 되물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 이정표가 될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는 들었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눈을 뜨지 못했다면, 우리는 여전히 목마르고, 답답한 시간들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자주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받아들이거나, 매우 제한적이고 주관적인 그 감각의 한계를 잃어버리고, 내 시선과 그 결과들을 보편적인 진리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귀먹고 말을 더듬는 이의 치유이야기는 우리가 듣고, 말할 수 있다고 하는 물리적인 능력과 우리들이 이뤄야할 목표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의 귀가 ‘열림’은 단순히 청력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2독서의 야고보서의 말씀은 우리가 직면한 세상으로부터의 열림입니다.
모든 생명이 소중하지만, 빈부가 있고, 귀천이 있는 세상, 하느님은 같은 생명을 주셨음에도 우리는 세속의 눈으로 보이는 기준에 따라 결코 같지 않음을 봅니다. 우리는 마치 사람에게도 등급이 매겨져 있는것과 다를 바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 세상은 하느님이 태초에 만드신 세상과는 다른, 그저 우리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만 존재하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시선에 갇혀서, 여전히 세상 사람들의 가치만을 신봉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한 결과는 우리들이 보고 있는 현재의 세상의 모습들입니다. 개인과 국가는 자신의 위상을 올려 더 큰 이익을 올리는 데만 급급하고, 그 안에 속한 개인들도 사실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 안에서 조차도 극과극의 차이와 차별이 있음에도 근원적인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데, 다른 곳에는 시선을 돌려 바라볼 여유조차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너는 무엇을 듣고 받아들일 것인지, 또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장애를 가진 이처럼,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깨어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귀먹은 이는 잃었던 청력을 일단 되찾았지만, 그 건강해진 몸으로 세상 사람들이 사는 그 곳으로 나아가 묻혀 버린다면, 오늘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적과, 그 근본취지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듯이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이전에 세상에 머물렀던 감각을 신앙이 이끄는 방향으로 돌리지 않는다면, 어렵게 얻은 일생의 은총인 믿음도 그 효력을 잃어버리고, 우리가 바랐던 결실도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총의 손길이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그 손길에 의해 갇혔던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가치의 세상을 바라보려 했습니다. 그토록 더 나은 삶을 원했던 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 새로운 세상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 지금에라도 우리는 그 목적지를 향해 온 힘을 다해야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