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주일)
21. 4. 11 한강주임
+ 찬미예수님
자비로우신 주님!
이 ‘자비’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라고 흔히 말하는 그 ‘사랑’을 뛰어넘어 조건 없는 포용을 가능하게 하는 진정한 힘을 뜻합니다.
사실 우리들의 사랑, 그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우, 이유가 있어야 하고, 내 마음에 드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또한 나와의 어느 정도 관계성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믿음 안에서의 ‘자비’는 그 모든 틀과 조건을 뛰어넘어, 어떤 사랑의 이름으로도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내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이라는 이 표현은 우리가 믿는 구세주의 본성, 신앙의 본질을 한마디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 겪게 되는 굴곡진 삶 속에서,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행태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변함없이 받아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주님께서 당신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입장에서 전적으로 이해하시고 받아주시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마음을,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모습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듭되는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그 부족함과 심지어는 배반까지도 더 묻지 않으시고 받아들여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보여주신 참 사랑, ‘자비’입니다.
각자의 처지와 관점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 목표에 도달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바로 그 자비로우심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과 한계, 나아가 부족한 믿음까지도 조건 없이 품어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우리의 인간적 생각들입니다. 우리 삶의 과정에서 이미 ‘굳을 대로 굳어진 생각’과 고집스러운 각자의 틀로 인해, 하느님의 마음까지도 미리 판단하고, 또 단정 짓고, 고민을 시작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스승의 부활을 의심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죽었던 스승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보고서 당연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여전히 인간의 생각에 머물러있는 제자들을 보고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리고 그 틀을 깨도록 거듭 거듭 촉구하고 계십니다.
“왜 그렇게 믿지 못하느냐?”
예수님의 부활 후, 제자들은 그 인간의 마음, 틀에서 점차 깨어납니다.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능력과 인간에 대한 사랑, 한없는 자비의 의미를 조금씩 깨달아 나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자들도 더 이상 세상의 핍박이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향하여 외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셨지만, 부활하심으로서 당신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당신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 자비로운 품 안에서 ‘참 평화와 안식’을 얻으십시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걸었던 이번 한 주간을 통해서, 우리가 가야할 믿음의 길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다져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님의 그 품안에서 이 고단한 세상을 기꺼이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자비로우신 주님께 굳센 믿음과 용기를 간절히 청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