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4주일
1. 31 한강주임
+ 찬미예수님(마귀 들린 영을 물리치시는 예수님)
오늘 시대의 위기와 두려움을 안고, 이렇게 주님 앞에 모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더 큰 힘을 가지신 주님께서 세상 삶의 모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코로나 사태가 시작된 이래 최근에 이르기까지, 신천지나 개신교 집단감염 사태가 이어지면서, 우리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행위가 이유 불문하고 한마디로 반사회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한편으로 도대체 그들이 생각하는 믿음의 내용과 이성적 판단과는 배치되는 행위들의 근본이 무엇인지 사뭇 궁금하기도 합니다.
복음을 포함한 성경 말씀 어디에도,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야 한다고 했지, 이웃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이웃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고 죽을 수도 있고, 그런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축복이 열배, 백배 주어지리라고 복음은 가르칩니다.
사회적 지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현실을 무시하고, 맹목적으로 반복되는 이러한 행태들은 같은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으로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들 입장에서도 매우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본래 우리의 믿음은 신앙을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과 신앙생활에 대한 각오와 마음가짐은 어느 정도인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따라, 사회적 합의나 국가적 상황에 최대한 협조를 하고 있지만, 복음 정신에 따른 우리의 희생과 절제가, 인간적 나약함에서 믿음의 나약함으로, 나아가 신앙적 퇴행이나, 세상과의 수동적인 타협으로 그치고 만다면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결국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야훼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보내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를 통해서 나의 뜻을 알게 될 것이고, 너희를 이끌어줄 것이다.”라고 전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신앙으로 인한 기나긴 고난의 시간 속에서, 그들을 이끌어줄 인도자, 구세주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이 그들을 오랜 방랑과 시련으로 부터 이겨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언젠가 구세주가 꼭 오셔서 자신들을 선택된 민족으로 다시 영광스럽게 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모든 것을 거는 것입니다.
오늘 코린토 1서의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 세상에서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에 우선하는 것이고, 오직 주님의 뜻을 앞세워 그분을 기쁘게 하는데 온 힘을 다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현실은 많은 경우에, 내가 앞서있고, 내가 누려야할 기쁨과 행복이 주님 안에서 누리게 될 행복보다 더 우선합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이라고 고백은 하지만, 내가 느끼고 맛볼 수 있는 세상의 것을 쉽게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궁극의 목적은 세상과 그에 속한 우리 자신의 구원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억압하고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하지만 결국은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것들의 본성을 깨달아,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의 믿음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사탄의 힘도 어쩌지 못하는 바로 그 힘을 얻고자 함이고, 진정한 믿음은 그것을 믿고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삶이 힘들수록, 우리가 다져야할 믿음과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힘,
그리고 주님의 이끄심과 돌봄의 의미를 간직하며, 또 기쁘게 한 주간을 지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