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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기자의 죽음

작성자  |노아가다 작성일  |2026.02.26 조회수  |46

젊은 기자의 죽음 노강(시인)


그 겨울은 유난히 차가웠다.
80년대 초, 서울의 작은 성당 앞에는 눈이 흩날리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바람은 살을 에 뜻 매서웠고, 성당 마당의 공기는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말은 없었고, 서로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같은 시대를 건너온 이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 슬픔이었고, 분노였으며, 조심스러운 연대였다.
그 시절은 전두환 군사정권 아래에서 진실이 쉽게 말해질 수 없던 시대였다.
언론은 철저히 통제되었고, 기자들은 국가 권력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은 그 시대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정권의 압력으로 광고가 끊기자 신문 지면은 하얗게 비어버렸고, 그 백지는 단순한 여백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진실, 그리고 강요된 침묵의 흔적이었다.
그 이후 많은 기자들이 해직되거나 연행되었고, 어떤 이들은 이름 없이 병들어 세상을 떠나야 했다.

그날 장례미사의 주인공인 홍**기자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의 가족의 대학 후배였고, 그래서 그의 죽음은 신문 기사로 접한 사건이 아니라 가까운 이웃의 일이었다.
홍 기자는 어느 날 퇴근길에 무지막지한 형사들에게 붙잡혀 연행되었다. 영장도, 설명도 없었다.
중앙정보부에서 이어진 조사 과정에서 그는 심각한 고문을 당했고, 이후 깊은 트라우마와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몸은 물론 마음까지 무너졌고, 더 이상 기자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긴 투병 끝에 그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미사는 서울 대교구 김*창 신부님이 집전하셨다.
성당 안은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고요했다.
미사가 중반에 이르렀을 때, 신부님은 고인의 아내와 어린 자녀들을 앞으로 불러 세우셨다. 창백한 젊은 미망인은 고개를 들지 못했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서 있었다.
신부님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조용히 입을 여셨다.
정의를 위해, 진실을 위해 살다 소리 없이 사라지거나 고문으로 병들어 죽음에 이르는 현실은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침묵해 온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했다.
마음으로만 미안해해서는 안 되고, 말로만 애도해서도 안 된다며, 오늘 이 자리에서 하느님 앞에 약속하자고 했다.

이 가족을, 이 아이들을 공동체가 함께 책임지자고. 성당 안은 깊은 정적에 잠겼다. 그 정적은 두려움이라기보다 결단에 가까웠다.
이윽고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이 가족이 머물 집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이는 아이들의 학비를 책임지겠다고 했고, 누군가는 매달 생활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은 요란하지 않았지만 진실했고, 그 장례미사는 죽음을 애도하는 미사가 아니라 이웃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공동체의 서약이 되었다. 나는 그 가족의 이웃이었다.

어느 깊은 밤, 홍 기자의 아내가 아이들을 집에 맡기려고 문을 두드렸다. 
남편이 퇴근 길 연행 후 풀려 난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잠자다 끌려갔다는 말과 함께, 집에 있던 책들이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우리는 말없이 책을 받아들고 밤새 찢었다. 종이는 손에 묻어났고, 글자들은 바닥에 흩어졌다.
찢은 책은 태워 재로 만들었고, 그마저도 불안해 화장실 변기에 조금씩 흘려보냈다.
물이 내려갈 때마다, 함께 사라지는 것이 종이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아내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김밥을 팔며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국가는 그 가족을 지켜주지 않았지만, 공동체는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았다. 성당에서 그날 나누었던 약속들은 크지 않았고, 눈에 띄지도 않았지만, 오래 이어졌다.
시간은 흘렀다. 아이들은 잘 자랐다. 그날 성당 앞에 서 있던 아이들 중 외아들은 신부가 되었고, 어머니는 지금도 성당 공동체 안에서 봉사하며 여생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기적이라기보다, 이웃의 아픔을 우리 모두의 책임으로 받아들였던 선택의 결과일 것이다.

가톨릭의 공동체 정신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고통받는 이웃을 ‘남의 일’로 두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한 기자의 억울한 죽음, 한 가족의 무너진 삶은 결국 우리 모두의 침묵이 만든 상처였다. 
그렇기에 그 상처를 함께 돌보는 일 또한 공동체의 몫이다.
눈 내리던 성당 마당에 가득했던 침묵의 사람들, 그리고 그 침묵을 행동으로 바꾸게 했던 한 신부의 목소리. 이 기억을 지금 다시 꺼내는 이유는 과거를 되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어떤 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그 겨울의 장례미사는 끝나지 않았다.
이웃의 아픔 앞에서 우리가 선택하는 순간마다, 진실은 조용히 이어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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