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나가 놀다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에게 어디서 뭘 하다 늦게 들어왔냐고 혼쭐이 난 기억이 있다.
나는 둘러댄다. 그것이 하얀 거짓말일지언정 당연히 말이 꼬인다.
내전보살(內殿菩薩)인 아버지를 몰라봤다.
객지 생활을 시작하면서 혼자 생활은 피할 수 없었다.
신독(愼獨)하려고 무던히 애를 쓴 기억이 난다.
다크 서클을 본 친구들이 안 봐도 비디오란 억측을 할 때
사람의 생각이 서로 다르고 제멋대로 곡해함을 그때 깨달았다.
신앙을 갖게 된 후로는
오매불망 “하느님”이다.
둘도 없는 껌딱지로 부끄럽지만 일상이다.
성경을 보자.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워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복음 10장 30, 31절)(루카복음 12장 7절)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하느님이시다.
살아가면서 서로 다른 사람을 싫거나 좋거나 곁에 두고 있다.
내면에 시기와 질투, 욕심 가득하여 감투를 즐기는 사람이 있고
남이 잘되는 것을 보기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으며
사익과 음해로 남을 이간질하며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하느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나마 더 많으니 다행이다.
성경에 이런 구절이 마음을 다잡게 한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7장 3절)
“위선자야”라며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성찰은 상대가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다.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疎而不漏) (노자, 도덕경)
하늘의 그물이 크고 넓어 성긴 듯 해도 하나도 빠트림이 없다는 말이다.
옳고 그름을 가려 선한 자에게 선물을 주고,
악한 자에게는 죄와 벌을 내린다니 무섭더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경외(敬畏)의 은총이 주어진 이유다.
“오만이 오면 수치도 오지만 겸손한 이에게는 지혜가 따른다.”(잠언 11장 2절)
프란치스코 교황은 얼마 전, 겸손은 교만에 맞서는 큰 적수로
“우리를 악마로부터 악마의 공범이 될 위험에서 구해주고, 모든 것을
올바른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했다.
나보다 나를 더 많이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나를 두 팔로 안아주심을
온전히 믿고 맡기고,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고 자아 성찰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를 위해 준비하신 큰 계획에 들어가는 것이고,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로 살아갈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