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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삶

어머니 글

작성자  |소심 작성일  |2013.10.14 조회수  |1334

회원에 가입하고 첫 글을 올립니다. 어머니(93세) 임영희 헤레나의 글입니다.
남동생의 진실하고 강한 믿음 우리 집안에서는 아버지께서 비과학적인 것은 믿지 않으시는 분이여서 옛날 그 시절에도 미신 같은 것은 아예 모르고 지냈으며 종교도 없었던 가정이었다.
옛 안사람들은 애가 병이 나거나 힘든 일이 생기며는 쉬이 점쟁이에게 매달리거나 굿도 하고 푸닥거리를 많이 했던 시대였으나 어머니는 그런 일이 전혀 없으셨으며 믿지를 않으셨다.
이런 가정에서 믿음 종교를 갖기 시작한 것은 내 남동생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상과(商科)를 공부하던 시절부터 시작되어 식산은행에 입사하고는 그 믿음이 순수하고 열정적인 성격 그대로 그 가슴 속에 굳은 믿음이 자라기 시작해 카도릭 성당에서 같은 믿음의 젊은이들과 활동 많이 하며 옳은 믿음의 종교인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 북한은 공산주의 세력 하라 직장마다 직장동맹이 있어 적색주의의 주입이 날로 심해가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어느 일요일에도 출근하라는 영이 내려져 모양, 동생은 성당 미사참례 때문에 늦게야 출근했더니 직장동맹에서 큰 난리가 났었던 것이다. 반동분자라고 험하게 지적을 하며 자아비판이라던가 그런 회의를 열어 동생에게 맹공격을 퍼부은 모양, 참다 참다 폭발한 동생은 그들 면전에 직장 동맹증을 집어 던지며 종교의 자유가 없이는 이 직장에 근무 할 수 없다고 하고 뛰쳐나왔으나 그야말로 생사의 갈림길 같은 장면이 된 것이었겠지.
그날 신변의 위험을 피해 동생은 남하 할 것을 결심하고 진남포로 내려가 아버지 생전에 사서로 오래 계셨던 친 혈육과 같은 홍덕영 형을 찾아가 그 긴박한 사정을 얘기하고 곧 배편을 수소문해줘서 험한 뱃길을 떠났던 것이다.
군산으로 해 서해를 내려 돌아 남해로 해서 남쪽 끝 부산으로 이 누나를 찾아 온 것이다. 초행인 부산에서 그래도 치과의사 회관을 찾아가 자형 성함을 말하고 우리 집 주소를 알아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모습으로 나타난 극적인 상봉의 순간, 가슴이 에이는듯 아프면서도 놀랍고 놀라운 기쁨의 만남이었다.
그 숱한 스트레스를 참아 이겨내느라 동생은 신경쇠약 상태로 기진 맥진한 모습에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왈칵 끌어 안았던 것이다.
이일은 우리도 남하하고 2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였다. 2층 방 셋 중 하나를 정해 우선 목욕하고 자리하고 쉬게 하고는 의사인 자형이라 1층 병원에서 짬만 나면 올라가 처남의 건강상태를 세밀히 돌봐주며 신경안정제 주사도 때맞추어 놔 주시고 알뜰히 정성으로 살펴주는 그 따스한 맘에 그저 고맙기만 했던 나였다.
나도 양분 있는 건강에 알맞은 식사준비에 맘을 많이 썼드랬지..
차차 몸도 마음도 안정이 되어가니 곧 성당에 가 신부님을 찾아 뵈야 되겠다며 가까운 성당이 어디냐고 묻는 동생, 신앙을 위해 사건을 넘어온 동생이니 그럴 수밖에, 우리 집이 용두산 바로 밑 큰 길의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는 대청동 소재여서 우리 집 뒷길로 가며는 바로 중앙 성당이 보이는 곳이었다.
동생은 곧 성당에 찾아가 신부님을 뵙고 고해성사도 받고 평양에서 진남포를 거쳐 배편으로 긴장 속에 남하한 사연을 얘기 드려 허다한 어려운 어려움 속에서도 저를 이곳까지 올 수 있게 무하신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는 소신을 털어 놓아 신부님도 같이 감격하셨다는 말이었다.
특별한 인연으로 신부님이며 사목위원들도 만나게 되어 성가대를 지휘하는 등 다시 진솔한 믿음의 나래를 자유로이 펼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 믿음을 갖지 못한 자형과 이 누나에게도 교리 공부하여 영세 받을 것을 간절히 원하는 동생이었다.
차차 건강이 회복되자 다니던 식산은행에 다시 취직하려고 자형도 애를 많이 썼지만 자리가 없어 불가능했는데 그때 부산 적산 관리처장이셨던 이가 자형과 친분이신 이창화씨라 기억되는데, 그 분에게 처남을 부탁해준 자형, 그분의 성의로 경리, 회계 등의 여러 가지 능력 테스트가 있은 뒤 합격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이 남한 땅에서 첫 출근을 하는 남동생의 의욕에 찬 모습에 감격 또 감격했던 누나였다. 그 직장에서의 직위를 뭐라고 했던가, 적산관리관 이라고 했나... 기억이 올해 유난히 감퇴되는 것을 느끼고 있는 때라 잊어버린 것이 너무 많은 요즘이다.
동생은 실력을 인정받아 승진 절차가 빨라 부산 관활 내 적산기업들에 감찰로 각 지방에 파견되어 성과를 많이 올린 동생, 그 당시 같은 감찰관이었던 양지수라는 젊은이와 한 멤버가 되어 부정 적발의 뛰어난 성과를 올려 표창까지 받은 일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동생은 출장 때 마다 해당 기업체가 나무 과하게 술대접을 하는 것에 질려 그 직장에 대한 혐오를 느끼게 되어 관직보다는 기술 방면으로 맘을 돌리고 있던 참에 경북대학 의대가 4년제 마지막 해 라는 뉴스에 결심하고 입시공부를 틈틈이 열심히 했지만 너무나 시일이 촉박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생은 의대 시험에 장하게도 합격을 한 것이다. 동생의 의대합격의 영광으로 너무나 흥분되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맘 가득가득 했었다.
드디어 동생은 대구에 거처를 옮겨 하숙을 하며 희망의 의학공부를 시작하고 불과 몇 달 만에 6.25동란이 터진 것이었다. 혈기에 넘치는 동생, 그야말로 원수 같은 빨갱이들을 내손으로 직접 무찔러야 한다며 그 귀하게 차지한 의학 공부를 뒤로하고 군에 자원입대한 것이다.
국가적인 막대한 시련은 물론이려니와 내동생의 자원입대 소식에 나는 그만 의식을 잃을 번한 충격의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가슴이 에이는듯한 아픔으로 동생의 면회를 위해 대구로 올라간 나는 그 훈련소를 찾아 갔다. 나는 입대한 군복의 동생을 만나게 되자 그만 데대로 격려도 못하고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아직 카토릭에 입교는 못한 상태였으나 그저 그저 주님의 한없으신 참사랑에 매달려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동생을 올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던 안타까운 누나였었다. 군에서는 건국 초창기여서 군비가 완전히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었는지 의대 학생들은 모두 군의관으로 임명되어 최전방 야전병원으로 이동된 동생, 생명을 걸고 나라를 위해 한 목숨 다하는 전쟁터이기에 동생의 믿음은 깊이를 더해 갔을 것이며 부상병의 빠를 회복을 위해 전세의 호전을 위해 많은 기도를 올렸을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진하게 실천하기위해 그 열정을 다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전후 다시 복학하여 4년을 마쳐 졸업하고 학창시절 하숙하던 대구 남산동에 많은 애로를 헤쳐 가며 성누가의원을 기업한 것이다.
야전병원에서 정성을 다해 익힌 실력과 기술 그리고 사랑의 실천으로 병원은 날로 번성해졌다. 결혼은 전쟁 중에 18육군부대 병원 주둔지인 경주에서 경주 성당에 피난 와 있었던 올케의 식구와의 극적인 만남으로 이 이뤄졌다.
올케 요안나는 평양에서 하숙 하며 직장을 다닐 때 하숙집 딸이였다. 슬하에 5남매를 두었고 종교적 가정 분위기에서 옳고 실력 있는 모습으로 성장시켜 현재 모두 자기들이 살고 있는 성당에서 열심히 신앙생활들을 하고 있다.
동생은 가까운 교구인 계산동 성당의 회장도 여러 번 겸임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기를 삶의 큰 의지로 지냈으며, 1984년 요한바오로 2세의 내한으로 거행 되었던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식에서는 영광스러운 성체 분배자로 부르심을 받으셨었다.
동생 내외는 이스라엘 유럽 등 성지순례도 자주하면서 믿음으로 살아왔다.
남산동 소재 병원과 주택을 겸한 곳에서 대명동으로 병원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그곳으로 옮기느라 수년을 신경도 많이 썼을 것이고 나이가 있어 피로한 상황에서도 계속 의욕적으로 환자를 보고 있었던 동생 자신의 건강에 적신호를 느껴 모교 경북의대에 검진 차 입원, 그만 한 달도 못되어서 병세가 악화되어 기어이 하늘나라로 간 장한 동생...
평시 지니고 있던 뜻대로 사후 시신은 모교 경북의대에 기증이 되었다.
계산동 성당에서의 동생의 추모미사가 봉헌 되었는데 수많은 신부님들, 그리고 수녀님들, 동생을 추모하는 많은 교우 분들, 병원 단골 환자였던 분들의 참례 하에 정성을 다해 치러졌으니 삶의 마지막 영광스러운 그리고 감격에 가득 찬 미사의식이 거룩한 광경이었던 것이다.
이 누나도 슬픔을 삼키고 동생의 여백이 온화한 잔영 되기 바랄 뿐이라오. 남산동 건물은 병원 이전 즉시 교구에 헌납하여 올케의 본명을 따 ‘요안나의 집’ 이라고 하여 현재 불행한 행려 여성들의 보금자리로 뜻있게 운용되고 있다.
장하다 내 동생 주님의 참사랑을 몸소 실천하려고 굳은 믿음으로 노력하며 살아 온 삶이니 하늘나라에서 길이길이 평화의 안식 누리기 비는 맘뿐인 늙은 누나의 가슴으로 울리는 하소연, 바램뿐이라오.

2013년 9월 5일 임영희 헤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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