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를 공부합시다]
(4) 예수 성탄 대축일
예수께서 우리 안에 탄생하시도록 낮아져야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예수 성탄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놀라운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위대한 강생의 신비입니다.
◇ 살펴봅시다
우리는 나자렛 사람 예수를 믿고 고백합니다. 그분은 약 2000년 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1세 때에 헤로데 왕이 다스리던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초라하게 태어나셨습니다. 직업은 목수였고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가 다스리던 시기에 예루살렘에서 유다 총독 본시오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바로 그 나자렛 사람 예수를 우리는 '하느님의 외아들'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분'으로 믿고 고백합니다(423항 참조).
㉠ 하느님의 외아들(441~445항) :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천사,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의 자녀, 그리고 그들의 왕을 부르던 칭호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칭호는 하느님과 특별히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느님 자녀로 입양된 이들을 가리키는 칭호였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 속에서, 예를 들면 하느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서, 하느님 은총으로 아들로 받아들여진 이들에게 두루 적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441항 참조).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일반적 의미에서만 아니라 고유한 의미에서 하느님과 같은 본질을 지니신 분으로서 하느님 아들이십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남자의 개입 없이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에서부터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아들인 당신에게 알려주셨기에 당신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1,27). 이 밖에도 예수님의 여러 말씀과 비유와 행적은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하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확인되셨습니다(로마 4,1 참조).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영원한 관계를 말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이시며 또한 하느님 자신이시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필수적이다"(454항).
㉡ 강생의 신비(456~463항) : 이렇게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을 '강생'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이성과 지혜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일이어서 교회는 이를 '신비'라고 부릅니다.
이 강생의 신비를 특별히 기념하는 예수 성탄 대축일에 우리가 깊이 살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나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거슬러 범죄함으로써 그 본성이 본 모습을 잃고 타락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타락한 인간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외면하고 거부해 어둠 속에 헤매고 있는 인간을 당신과 다시 화해시켜 구원하시고자 당신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함께 하시는 당신 '말씀'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335?~395?)가 한 강론을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병든 우리의 본성은 치유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다시 일어서야 했고, 죽은 인간은 다시 살아나야 했습니다.…어둠에 갇혀 있던 사람에게 빛이 비춰야만 했습니다. 사로잡혔던 우리는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노예였던 우리는 해방자를 기다렸습니다.…인류가 이처럼 불행하고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으므로, 이러한 이유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를 찾아오시게 할 정도로 하느님을 움직이게 할 만하지 않았겠습니까?"(457항)
달리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고 당신 말씀을 세상에 보내시어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또 우리에게 거룩함의 모범이 되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되신 말씀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분부하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나아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하느님의 말씀인 그분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항).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매주일 미사 때 고백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한 마디로 압축돼 있습니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믿음을 매일 바치는 삼종기도에서 다시 경건하게 고백합니다. "이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저희 가운데 계시나이다."
◇ 생각해 봅시다
-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는 마구간에서 가난하게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의 탄생을 목격한 첫 증인들은 대신들이 아니라 순박한 목동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난에서 하늘의 영광이 드러난다"(525항)고 교회는 고백합니다. 왜일까요?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를 돕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가난한 이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은 배척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유에서부터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이들의 삶에 참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되셨습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당신 자신에게 해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544, 2443항 참조)
예수님의 가난한 탄생은 우리에게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라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라는 요청입니다.
- 구세주 탄생은 2000년 전의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탄생하셔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낮아져야 합니다. 낮추어야 합니다. 작은 이가 돼야 합니다. 우리가 새로 나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성탄의 신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형성될 때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526항).
[평화신문, 2012년 12월 23일, 이창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