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묜은 부인과 자녀들을 거느리고 사는 구두수선공이다. 하도 가난하여 그가 옷을 입고 외출하면 마누라는 입고 나갈 옷이 없어 집안에 갇혀있을 정도이다. 단 한 벌 있는 외투가 낡아서 양털가죽을 사서 새 외투를 지을 마음에 돈을 모았다. 남에게 빌려준 돈을 받아서 가죽을 사려 했으나, 돈을 받지 못 하자 속이 상하여 푼돈으로 술을 마신다. 그가 집에 돌아오는 도중에 성당 옆에서 발가벗은 청년을 발견하는데, 처음에는 두려운 마음에 그냥 지나쳐 갔으나, 그가 얼어죽을까봐 다시 돌아와 자신의 외투와 털장화를 벗어 입히고 마누라의 무서운 반응을 걱정하며 집으로 데려온다.
예상한대로 세묜의 마누라 마뜨료나는 화를 엄청 낸다. 양가죽을 사러 갔던 남편이 맨손으로 술을 마신 채 돌아왔고, 게다가 거지 청년에게 외투와 구두까지 신겨서 데리고 왔기에 분노한 그녀는 남편이 빌려 입었던 자신의 옷을 벗겨 입고서 집을 나가버리려 한다. 그러나 "당신은 하느님의 사랑도 없단 말이오?" 라는 세묜의 호소에 마누라는 마음이 바뀐다. 그리고는 기가 죽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청년이 불쌍한 생각이 들어 빵과 음료뿐인 저녁을 대접한다. 청년은 마음이 놓이는 듯 순간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이 환해졌다. 식사 후, 청년에게 추운 벌판에 옷도 없이 내던져진 연유를 물으나 그는 자신의 이름이 미하일이고, 이 곳 사람이 아니며, 하느님의 벌을 받았다고만 말한다. 마뜨료나는 시몬의 헌옷을 그에게 입히고 잠을 재운다. 옷도 아깝고 내일 아침에 먹을 빵도 다 없어진 게 아쉽지만, 청년의 환한 미소를 생각하니 그녀의 마음은 따뜻해졌다. 내일 아침은 이웃에서 곡식을 꾸어오도록 해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미하일은 아무 것도 할 줄 모르고 오갈 데도 없었다. 세묜이 밥값을 하라고 구두 짓는 일을 가르치자 그는 말없이 열심히 배워서 훌륭한 솜씨로 구두를 지어내었다. 일 년이 지나자 청년이 짓는 구두는 마을에서 명성을 얻어 세묜의 구두방은 번창하고 살림이 풍족해졌다. 어느 겨울날, 한 신사가 방문했다. 체격이 무쇠처럼 건장한 갑부로 최고급 가죽을 가져와 1년을 신어도 찢어지지 않는 구두를 만들어 달라 당당히 주문했다. 수공비로 10루블이라는 큰 돈을 내겠지만, 만약 구두가 일년 내에 망가지면 세묜을 감옥에 처넣겠다고 호령했다. 세묜이 걱정스러워 미하일에게 묻자, 그는 주문을 받으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은 손님의 뒤쪽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싱긋 미소를 짓더니 얼굴이 밝아졌다. 그가 세묜의 집에 온 뒤로 보이는 두 번째 미소였다. 그런데, 솜씨 좋은 미하일에게 신사의 어려운 주문 화를 맡기고 나중에 보니, 미하일이 그 고급 가죽을 장화용이 아닌 실내화로 만들어놓은 것이 아닌가. 세묜과 부인이 미하일이 처음으로 해놓은 실수를 보고 공포에 질려 있는데, 갑자기 신사의 하인이 들이닥쳤다. 자신의 주인이 집에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급사하였으니, 장화가 아니라 죽은 자를 위한 실내화로 만들어달라는 마님의 분부를 전했다. 미하일은 완성된 실내화를 건네었다.
미하일이 세묜과 함께 산 지 6년이 지난 어느 날, 중년의 여인이 두 소녀를 데리고 구두방을 방문했다. 한 아이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미하일은 하던 일감을 놓고 그들을 주시했다. 전혀 한눈파는 법 없이 일만 하던 미하일이 하지 않던 짓이었다. 쌍둥이로 귀티 나는 어여쁜 소녀들이라 하더라도, 미하일이 보이는 관심에 세묜 부부가 놀랄 정도였다. 소녀들의 발 치수를 재며 마뜨료나는 중년 여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중년 부인은 쌍둥이의 엄마가 아니었다. 6년 전에, 졸지에 남편을 잃은 이웃여인이 아기를 낳은 지 며칠 안 되어 사망하였다.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한 아기를 덮쳐서 다리 한쪽을 상하게 하고서. 이웃 사람들은 불쌍한 여인의 장례를 치러주고, 갓난아기들을 마침 해산을 한 중년 부인에게 맡겼다. 처음에는 다리를 다친 아기는 죽을 것이라 포기하고 젖을 주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불쌍한 생각이 들어 젖을 먹였더니 잘 자랐다. 자신의 아기는 유아 때 세상을 떠났기에 그 후로 쌍둥이 소녀를 자신의 아이로 길렀다. 다행히 가세는 유복해졌고, 그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어떻게 살았을지 모르겠다고 감사해하는 것이었다. "이 애들은 나의 기쁨이지요. 부모는 없이 살아도, 하느님이 안 계시면 살지 못 한다는 격언이 참말이지요!" 부인의 말이 끝났다. 미하일이 앉아있는 구석이 섬광처럼 환해져서 바라보니, 그가 무릎위에 손을 놓고 하늘을 향해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손님이 떠나고 나자, 미하일은 일감을 탁자에 놓고 세묜 내외에게 공손히 절을 하며 말했다. "이제 작별을 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용서하셨으니, 주인님 내외분도 제게 잘못된 점이 있다면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미하일에게서 후광이 빛나고 있었다. 세묜은 미하일이 보통 인간이 아님을 깨닫고 물었다.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는 침통한 표정이었으나, 내 마누라가 저녁 준비를 할 때 미소를 지어 밝은 표정이 되었는데 무슨 까닭인가? 그 후에 부자 신사가 장화를 주문할 때 미소를 지으며 환한 얼굴이 되었던 까닭은? 그리고 세 번째로 중년부인에 데려온 두 소녀를 보고 미소 지으며 온 몸에서 빛이 환하게 난 것은 또 어떤 이유인가?" 미하일은 대답한다. 자신은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지상에 떨어진 하느님의 천사였다고. 하느님은 미하일에게 갓 쌍둥이를 출산한 한 여인의 목숨을 거두어 오라고 명령하셨다. 산모는 엄마나 아빠가 없이는 어린 생명들이 살아나지 못 한다고 천사에게 살려 달라고 간청했다. 천사는 불쌍한 마음에 그녀를 살려두었다. 하느님은 다시 분부하셨다. "지금 곧 산모의 영혼을 거두어라. 그러면 세 가지 질문의 답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인간의 내부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세 가지 답을 알게 되는 날에 너는 다시 하늘로 올 수 있을 것이다." 산모의 영혼은 홀로 하늘로 올라가고 천사 미하일은 날개가 떨어지고 벌거벗은 채 성당 건물 밖에 남게 되었다.
미하일은 감격에 잠긴 세묜 부부에게 설명한다. "인간의 내부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를 지나쳐 가던 취한이 다시 돌아와 구해주었습니다. 그의 가난에 찌든 부인이 증오에 차 죽음의 독기가 느껴졌는데, 하느님의 사랑이란 말을 듣고 갑자기 나에게 친절해지는 모습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첫 번째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때 나는 인간 안에 무엇이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인간 안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1년을 신어도 끄떡없는 구두를 주문하는 부자의 뒤에서 나의 동료인 죽음의 천사를 보았습니다. 인간은 일 년 후를 대비하지만 자기가 그 날 저녁으로 죽는 것은 모르는 것을 보고 두 번째 미소를 지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에게 정작 필요한 것을 아는 지혜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세계에 떨어진지 6년이 되어, 쌍둥이 소녀를 데리고 여인이 방문하여 어머니를 잃은 두 소녀가 잘 자란 것을 알았습니다. 갓난아기의 어미는 애들을 기르기 위해 목숨을 살려 달라 간청했지만, 엄마가 없어도 타인이 두 애기를 길렀습니다. 그 여인이 남의 자식인 소녀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서 나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고 인간이 무엇으로 사는지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 가지 중 마지막 답을 내게 보여주셨고 나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미소를 지었습니다." 드디어 미하일은 천사의 모습으로 변하여 세묜의 가족에게 장엄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하늘로 올라갔다.
“나는 모든 인간이 생활하고 지탱하고 있는 것이 자기 자신의 몸을 돌봄으로써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죽어가는 어미는 두 아이가 살아가는데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부자는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저녁때까지 필요한 것이 장화인지 죽은 자를 위한 슬리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내 자신을 걱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곁을 지나가던 행인의 사랑과 그 마누라의 동정과 애정으로 인해 살아났습니다. 그들이 나를 가엷게 여겨 사랑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쌍둥이 고아 소녀들이 살아남게 된 것도 어미의 돌봄이 아니라 그 아이들과 남남이었던 한 여성의 마음속에 사랑이 깃들어 있었고, 그녀가 두 아이를 가엷게 여겨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자기 몸만을 생각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깃들인 사랑 때문에 생존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태초에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들이 잘 살기를 열망하고 계심을 알고 있었지만, 이제 난 그 이상의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각자 따로 살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기에, 사람들 각자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가르쳐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을 합쳐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자기와 다른 모든 이들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깨달았습니다. 인생이란, 각자 자기를 돌봄으로써 사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다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 실은 인간이 사는 것은 오로지 사랑의 힘입니다. 진실로 사랑이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은 그 사랑 안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곧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 1826-1910)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요약 -
#1. A.C. 그레일링(A. C. Grayling)은 “‘작가가 되고 싶어’라고 말하는 사람과 ‘글을 쓰고 싶어’라고 말하는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칵테일파티에서 주목 받고 싶은 사람이고, 반면에 후자는 책상 위에서 고독의 시간을 가지며 오랫동안 준비하는 사람이다. 전자는 작가의 지위를 원하고, 후자는 과정을 중시한다. 전자는 원하는 것이고, 후자는 실행하는 사람이다. 결국 후자가 뭐든지 이루어낸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과만을 좇다보면 성취하는 순간 잠시 행복할 뿐,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게 됩니다. 반면에 과정을 즐기다보면 늘 여유롭게 살아가게 되고, 일상생활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작가’라는 단어를 ‘가톨릭인’으로 바꾸어놓으면, ‘(진정한) 가톨릭인이 되고 싶어’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로 말이 바뀔 것 같습니다.
#2. 4월 중순에서 5월초까지 중간고사를 치루고, 이제 대학은 체전과 축제의 기간을 보내면서 교정이 떠들썩합니다. 다시 말해 대학 도서관은 시험 기간이 끝난 관계로 좀 한산한 시기라는 의미가 됩니다. 시험 때마다 학생들의 시험공부를 위한 작심 8단계가 있습니다.
- 오늘만 놀고 내일부터 해야지!
- (학교에 있을 때) 집에 가서 해야지!
- 저녁만 먹고 해야지!
- (밥이나 간식을 먹고 나면) 배부르니 좀 쉬었다가 해야지!
- (드라마 시간이 되면) 이 TV 프로그램만 보고 해야지!
- 밤새워 열심히 해야지!
- (졸리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해야지!
-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서) 다음부터 잘 해야지!
평소 무심코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가, 눈앞에 혹은 발등에 시험이나 리포트 제출 마감일 같은 시간이 닥치면 많은 학생들이 반복하는 작심 8단계입니다. 이때가 되면 안절부절못하며 평소 냉정함을 상실한 체 더욱 갈팡질팡하게 서두르다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시험을 치루거나 리포트를 제출하고는 안이하게 보낸 지난 시간을 후회하지요. 하지만 이 시기를 벗어나 축제기간 또는 방학이 되면 내가 언제 그랬느냐하며, 반성과 후회의 순간조차 망각합니다.
사랑의 실천은 시험 기간이나 리포트 제출 기일처럼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언제 어느 장소에서라도 항시 사랑의 손길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실천할 자세보다도 먼저 아주 조그마한 사랑이라도 실천하고 있어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복음 25:35-36)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요? 최후의 심판날 주님 오른편에 앉는 것이 단지 주일에 미사에 (늦게라도) 나와 영성체만 하고 (마침예식이 끝나지도 않고) 가면, 혹은 미사봉헌금이나 교무금만 제때 내면, 주님 오른편 좌석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모든 신자분들께서 조그마한 사랑이라도 이웃과 나누는 '사랑을 실천하는' 성모성월이 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