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이 타계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타계한지 1년이 조금 넘은 시점에 다시 이 땅의 정신적 지주 중 한 사람인 법정스님이 세상을 뜬 것이다. 솔직히 불교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숭산스님이나 성철스님에 관한 얘기는 기사에서 보거나 책으로도 읽으면서 그들의 큰 그릇됨에 감동하기도 한 바 있었지만, 조용히 국내 작은 암자에 칩거하며 홀로 구도 정진에 힘쓴 법정스님을 나는 별로 잘 알지 못하였다. 그러던 차였으므로 신문과 방송에서 그의 타계를 아쉬워하고 또 그의 ‘무소유’ 철학에 대해 공감하며 그의 떠남을 애석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도할 때, 법정스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개인적으로 크게 궁금하였다. 그러니 법정스님이 쓰신 책 중 두어 권을 스님이 자신이 쓴 모든 책에 대해 절판하도록 유언을 남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부랴부랴 서둘러 구입하여 읽게 된 것을 너무 나무라지 마시길.
20대의 혈기 왕성한 나이에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 출가하여 효봉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며, 불교의 모든 계율을 혼자 있는 매 순간에 철저히 지키면서, 세속의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자 치열한 ‘구도정진(求道精進)’의 삶을 살고자 노력한 면면이 70년대 초엽부터의 단상(短想)으로 ‘무소유’란 책에 실려 있었다.
자신이 집착하면 거꾸로 그것이 자신을 소유하고 구속하게 된다는 생각으로,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참다운 해방, 진정한 자유, 그리하여 완전한 ‘해탈’에 이르고 싶었던 스님! 그러기 위해 일상사의 별거 아닌 세세한 일과 만남의 모든 것들을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맑고 잔잔한 양심과 투철한 지성으로 살피고, 승화시키며, 그로부터 완전히 초월하고자 한 노력들이 절제된 필체로 아름답고 간결하게 쓰여 있었다. 대학 시절 잠깐 배운 것으로 ‘나의 것들이지만 사실은 본디로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것들,’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非有非無 亦有亦無),’ ‘있는 것 없는 것이 구분이 없고 결국 합하여(有無合故) 도를 이룬다’라는 불가의 진리와 큰 가르침이라고 배웠는데, 이러한 가르침을 순수무구한 자연의 깊은 산속에서 통렬히 파악하고 실천하려 애쓰는 모습이 참말로 인상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억조창생(億兆蒼生)의 만물 중 기적같이 인연이 닿아 자신과 만나게 된 사람, 사물, 심지어 작은 미물에 이르기까지 억겁으로부터의 필연적 인연 안에서 만나기도 하고 인연이 끝나 떠나보내기도 하는 것이라면서 일상사의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끊어 가는 모습이 간결하게 꾸밈없이 그러나 감동적인 문체로 기술되어 있었다.
사바세계를 벗어나 구도 정진하는 스님이지만, 사바세계의 번민과 안쓰러움을 뜨거운 가슴으로 안았던 스님, 자기 정진을 위하여 수많은 책을 읽고 지식의 지평을 열어 갔지만, 그 어떤 지식을 자랑하는 것도 경계하고 다만 그 배움대로 깨달은 대로 행하고 있는지 엄정한 눈으로 자신을 경계함을 한시도 잊거나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종국에는 마음과 말이 일치하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숭고한 인격과 고매한 인품을 지니게 되는 모습, 그러면서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하게 되는 30대 초반의 매섭고도 치열한 ‘구도정진(求道精進)’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장학금을 주는 등 선행을 하고나서 선행한 사실마저 잊어버림으로써, 선행을 한 기쁨과 그 기쁨을 소유하고자 하는 명예심마저 버리려하였다는 진정한 ‘무소유’ 또는 ‘자기부정’을 통해 도달하고자 한 ‘해탈’ 또는 ‘거룩하다(聖)’ 고 할 경지를 거기에서 볼 수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생전에 당신이 만나게 된 모든 이웃들에게 한없는 인정과 사랑으로 대하고 모든 것을 가능한대로 베풀며 세상을 떴을 때 자신의 이름으로 된 통장에 불과 27만원인가가 남았는데, 그 마저도 방문객들에게 선물할 요량으로 맞춰 놓은 묵주 값을 지불하기에도 모자랐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추기경의 철저한 ‘무소유’와 나눔의 정신이 온 세상에 짠한 감동을 주었듯이, 법정스님의 치열한 ‘자기 비움’과 이웃에 대한 끝없는 베품의 정신도 그의 사후에 널리 알려지면서 우리의 가슴에 큰 감동과 평화로운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쏟아내면서 스스로를 초월하여 자신의 경계를 벗어나는 경지에 이를 때 우리는 ‘거룩한(聖)’ 경지라고 하지 않는가? 그것은 마치 어린 김연아가 아사다 마오를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11살 이래 마음에 품었던 올림픽 금메달을 향하여 정진하면서 올림픽 때 자신이 연습하며 해 온 그대로 할 수 있느냐 없느냐만 생각하고 모든 것을 쏟아낸 결과가 금메달이여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김연아가 금메달에 대한 기대를 접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애 모든 것을 다한 노력 후엔 그 색깔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생애에 허락된 하늘의 섭리에 순응하겠다는 신앙이라고 할까 구도의 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의 욕구나 바램을 넘어 최선을 다한 후 하늘의 섭리를 받아들이겠다는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의 정신, 그렇기에 어떤 결과나 분위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히 임할 수 있었던 김연아에게서 우리는 아사다 마오까지 동반자로 포용하는 넓은 정신을 볼 수 있었고, 이런 김연아는 결국 스포츠를 ’거룩한‘ 구도의 정신으로까지 승화시키면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며, 반대로 김연아와의 승부와 결과에 너무 집착하였던 아사다 마오는 스포츠와 예술 구도의 정신에서 이미 시합 전부터 김연아에 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법정스님의 다비식을 마친 지금 온 강토를 관으로, 온 우주를 자신의 무덤 삼아 홀연히 산화한 큰 스님의 넓은 마음과 큰 그릇됨이 사무쳐온다.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인연을 존중하였음은 물론, 산 속 깊은 곳의 동물들이 겨우내 언 개울에 내려와 물을 못 마실까봐 이른 밤 강가로 내려가 물구멍을 뚫고, 그것이 쉽게 다시 얼어 막힐까봐 공기구멍마저 이곳저곳 서너 개 만들어 놓고서야 안심하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는 만물에 대한 그의 거룩한 마음까지 헤아리면서, 오늘 우리의 가족들과, 생업의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이웃들, 그리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부딪치는 모든 행인들에 대하여서까지 한껏 경건한 마음으로 대하고, 특히 우리의 어린 꿈나무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큰 꿈과 바램을 달성시킬 수 있도록 도우면서 이렇게 위대한 스님의 거룩한 정신을 본 받으며 키울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