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 부러져 떨어졌는 데도 편안히 웃기만
가톨릭시보사 사장 시절에 교도소엘 밥 먹듯이 자주 들락거렸다.
무슨 죄를 짓고 잡혀 들어간 게 아니라 재소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주일미사나 고해성사 때 재소자들을 대하고 있으면 '순백의 영혼' 같은
천사를 만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 사랑 안에서
다시 태어나려고 애쓰는 그들의 선한 눈빛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다.
특히 고해실에서 그들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교도소) 밖에 있어
야 할 사람이 안에 있고, 안에 있어야 할 사람이 밖에 있는 것은 아닌
가'라며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들이 죄를 짓고 교도소까지 오게 된 사연을 눈물로 털어놓을 때는
'무전유죄 유전무죄(無錢有罪 有錢無罪)'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아 함께
울곤 했다.
내가 재소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사집전과 고해성사가
전부였다. 이따금 돈이 생기면 그걸 소장에게 주고 "재소자들에게 고깃
국 한번 끓여 주라"고 부탁했다. 기름진 음식을 먹지 못해 얼굴이 늘
까칠까칠한 게 마음에 걸려 그랬던 것이다.
재소자들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그들은 출소하는 날이면 나를 곧잘 찾
아왔다. 대부분 차비를 얻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럴 때면 "얼마
나 고생이 많았느냐.이제부터 마음 단단히 먹고 새 출발을 하라"면서
호주머니를 톡톡 털어 돈을 쥐어 줬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한결같이 차비가 가장 많이
드는 제주도나 강릉이 고향이라는 것이었다.어느 날 출소자라면서 사무
실에 찾아온 사람의 언행이 하도 수상해서 교도소에 문의했더니 출소자
중에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냥 돈을 뜯어낼 요량으로 찾아온
사기꾼이었다.
그때부터 출소자가 찾아오면 항상 교도소측에 신원을 확인했는데 10명
중에 7, 8명은 그런 사람들이었다.그래서 아예 신문사 직원에게 차표를
직접 끊고 차 좌석에 앉는 것까지 보고 오라고 시켰는데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 때 만난 재소자들 가운데 최월갑이란 사람은 뇌리에 각인된 것마냥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는 살인강도죄를 짓고 사형선고를 받은 젊은 사형수였다. 개신교 신
자였던 그가 천주교로 개종하고 싶다고 해서 미사도 드려 주고, 수녀님
께 교리를 잘 가르쳐 주라고 특별히 당부까지 해 놓고 만났다. 그는 이
미 신앙 안에서 죄를 깊이 뉘우치고 용서받은 상태였다. 선하디 선한
눈빛만으로도 그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세례를 받기 직전에 사형 대에 서야 했다.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교도소로 달려가 그에게 조건부 세례를 주었다. 죽음을 앞둔 그는
놀라우리만치 평화로웠다. 오히려 다시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일상으
로 돌아갈 내가 울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선물로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 를 살려 내신 복음(요한
11, 38-44)을 읽어 주었다. 그는 천주교묘지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
기고 사형대로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쿵"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 소리는 심장에 꽂히는 비수(匕首)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주위가 쥐죽은듯 조용했다.
그런데 잠시 후 간수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 내 옆에 있는 소장에게
뛰어왔다.
"소장님, 월갑이, 월갑이가…."
"왜 그래. 무슨 일인가?"
"월갑이가 저 밑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어요."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야. 죽은 사람이 웃다니?"
현장에 가 보았더니 그가 목에 밧줄을 걸고 정말 편안히 웃고 있는 것
이 아닌가. 나무로 된 낡은 교수기(絞首機)가 그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
고 부러져 아래로 함께 떨어진 것이었다.
소장은 즉시 "사형집행 계속!" 명령을 내렸다.젊은 사람을 두 번 죽여야
하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난 애처로운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
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의 손만 꼭 잡고 있었다. 간수들이 사형 대를
고치는 것을 태연스레 보고 있던 월갑 이가 말문을 열었다.
"미안해 하지 마세요. 전 괜찮습니다. 지금 죽는 것이 제게는 가장 복된
죽음입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믿음이 있으면 제 말을 이해하실
거예요."
그리고 내게는 "제가 반시간쯤 후면 천당에 가 있겠네요"라며 날 위로
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두 번째 죽음도 편안하게 받아
들였다.
다음날 시신을 인도받아 계산 동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봉헌했다.
미사 참례자들에게 내가 목격한 그의 죽음을 전하면서 부활신앙에 대한
강론을 했다. 그리고 유언대로 시신을 교회묘지에 안장했다.
인간은 무수한 만남 속에서 살아간다. 돌아서면 금방 잊혀지는 만남이
있는가 하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만남이 있다. 난 40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와의 만남을 생생하게 기억한다.그가 죽음을 받아
들이는 자세와 부활신앙에 대해 많은 묵상거리를 남기고 떠났기 때문인
것 같다.
또 그 무렵 행려 병자와 장애인들을 수용하는 시립 복지시설 '희망 원'
에 자주 들렀다.치료 한번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한 병든 사람들, 거리에
서 구걸하다 잡혀온 거지들, 손과 발이 뒤틀린 장애인들, 피를 토하면서
기침을 하는 폐병 말기환자들….
그런 부류 사람들 1000여명이 열악하기 짝이 없는 시설에서 형편없는
먹거리로 연명하는 것을 보면서 '희망 원이 아니라 절망 원'이라는 생각
을 했다.
그런데 그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어떻게 든 힘
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돈을 얻어다 갖다 주고,봉사활동을 하도
록 수녀 회와 연결시켜 주었다. 날이 갈수록 그들에게 마음이 끌렸다.
가난하고 소외된 그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기 시작 했
다. 희망 원에 발길이 부쩍 잦아진 나를 발견하고는 한동안 갈등에 빠
졌다.
'이들이야 말로 예수님 사랑을 가장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 아닌가.
그렇다면 이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그분의 사랑을 증거해야지 왜 머뭇
거리고 있는가. 그런데 이들과 똑같이 먹고 자면서 살아갈 용기가 있는
가….'
이 고민을 몇 사람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 험한 일을 왜 시작하려
고 하느냐"면서 말리는 사람들 뿐이었지 용기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망설임 속에서 살아가던 어느 날, 교황대사님 전화를 받았다. "한
번 만나고 싶으니 서울로 올라오라"는 용건이었다.
<계 속>
[평화신문, 제736호(2003년 8월 10일),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갈멜 수도회 수도자들의 삶을 노래한/故 최민순 신부님의 아름다운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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