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한강성당

로그인

로그인 상태 유지

닫기

성당 대표 메일 안내 office@hankang.or.kr


한강 게시판


> > 함께하는 삶

함께하는 삶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21, 22

작성자  |Parsley 작성일  |2010.02.25 조회수  |1425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21
        『 가톨릭시보사 사장 시절 』

1

        김수환 추기경(가운데)이 가톨릭시보사 사장신부로
        재직하던 1965년 9월 직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가톨릭 신문



    
    1963년 11월, 독일에서 7년만에 돌아왔다.
    


    그 사이에 한국 가톨릭은 정식 교계제도를 갖추고 자립기반을 닦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가 교회발전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는 길은 독일에서 보고 배운 것을 사목현장에서 열심히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구장님은 난데없이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 직을 내게 맡기셨다. 신문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어 막막한 심정으로 출근한 신문사. 난 그 곳에서 2년 동안 밥 먹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일에 미 쳐 살았다. 돌이켜 보건대 내 일생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린 때는 시보사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그 때만 해도 가톨릭시보는 말이 신문이었지 신문이라고 내밀기가 부끄 러울 정도로 모든 게 열악했다. 10명이 채 안 되는 기자와 직원이 만성 적자에 시달리면서 근근이 신문을 내는 실정이었다. 독일 유학시절에 고국교회 소식이 궁금해 우편으로 배달되는 가톨릭시보를 한 글자도 빼 놓지 않고 애독하기는 했지만 신문이 이토록 열악한 환경에서 만들 어 지는 줄은 몰랐다. 구독료 수입이 적다 보니 기자들 봉급 챙겨 주는 일 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 여건에서 나름대로 전력투구 하다 시피하면서 신문을 만들었다. 신문이란 게 기획단계부터 최종 인쇄까지 일일이 손이 가고, 정성과 애 정을 쏟아야만 제대로 나온다. 윤전기에서 막 나와 잉크 냄새가 진동하 는 신문을 펼쳐 들면 예술가가 고된 작업을 마치고 한 발짝 물러서서 작품을 관조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밤낮없이 정성을 쏟으면서 부지런 히 일하니까 발행부수도 늘어 한결 재미가 붙었다.

    하지만 수지타산을 맞추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발행부수와 광고가 적어 적자를 면 치 못하는데 그나마 있는 독자들도 구독료를 제때 납부 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구독료를 그냥 떼먹겠다는 심보라기보다는 잊어 버리고 안보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그래서 짬이 나면 가방을 들고 직접 성당으로 밀린 구독료를 받으러 나갔는데 어떤 성당 사무실에서는 잡상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저, 신부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직접 뵙고 말씀 드려야 하는데…." "신부님이 그렇게 한가한 분이 아닙니다" "그래도 좀 어떻게…." "허허, 이 양반이 말귀를 못 알아 듣네."

    내가 '독일 물' 좀 먹었다고 독일식 사제 복을 입고 다녔으니 문전박대 를 당하는 것은 당연했다.그 당시 독일 신부들은 로만 카라 대신 와이 셔츠에 달린 것 같은 칼라가 붙은 흰옷에 셔츠를 받쳐 입었다.

    그래도 편집국은 가족같은 분위기였다.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직원들 봉 급을 적정수준에 맞춰 주려고 노력했고, 특별히 생활이 힘든 직원에게는 남들 눈에 안 띄게 도움을 줬다.부수와 광고가 늘어나니까 직원들 사기 도 제법 올라갔다. 난 신문사에서 봉급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돈을 일절 갖다 쓰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1원이라고 더 보태서 재 정을 튼튼하게 할까 궁리했다.

    그때 제2차 바티칸공의회 바람이 한국교회에 불어오기 시작했다.로마에 서 열리고 있는 공의회 소식을 보도하는 일만큼은 사명감을 갖고 임 했 다. 한국교회가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가 되 려면 공의회 정신을 올바로 알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같은 건물에 동아통신사가 있어서 외신이 타전하는 공의회 뉴스 를 시시각각 받아 볼 수 있었다. 일반 통신사는 종교뉴스가 들어오면 거의 다 버리는데 난 동아통신사에 "바티칸 소식을 모두 넘겨 달라"고 부탁해 뉴스를 빠뜨리지 않고 꼼 꼼이 챙겼다.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 되는 것은 번역을 맡기거나 그게 여의 치 않으면 직접 번역을 해서라도 신문에 실었다.

    난 가톨릭시보가 비록 종교매체이지만 비신자도 읽고 싶은 신문이 되어 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려면 종교매체도 세상 사람 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그 때 사설(社說)은 내 가 거의 다 썼는데 사회적 사건과 흐름을 신앙적 눈으로 조망하는 주제 도 심심찮게 다뤘다. 어느 날 신문사에 드나드는 정보과 형사가"가톨릭 시보에서 이런 사회적 얘기도 쓰네요"하며 관심을 보인 적이 있다.

    변화와 쇄신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다.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변해야 하고, 무엇을 쇄신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심 끝에 유명한 목사와 스님, 이어령씨 같은 명사에게 편지를 띄워 "가톨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루빨리 고쳐야 할 단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등의 질문을 했다. 그분들이 보내 준 답장원고를 보니까 가톨릭을 사정없이 비판하는 글이 많았다.

    심지어 '교회 밖 사람들이 가톨릭을 이토록 부정적으로 보는가?'하며 탄식한 적도 있다.그 원고들을 토씨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신문에 게재했다. 원고의 일부분을 옮긴다.

    "교황의 독점 성서해석의 권위는 재고해야 한다. 베드로는 어느 특정한 개인에게가 아니라 '비두니아'에 흩어진 모든 성도들에게 왕 같은 제사 장들이라고 했다면 그리스도인은 누구나가 다 제사장이 될 수 있고 성 서해석의 권리가 있다.… 로마교회가 단순히 용어와 어휘상의 오해가 종교개혁을 가져왔다고 보고 이에 대한 재음미만 힘쓴다는 것은 종교 개혁의 진의를 모르는 소치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영헌 기독공보 편집인, 1964년 8월2일자 게재)

    장면 박사님 같은 분은 걱정이 되셨는지"신문에 이런 글이 실려도 되느 냐"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주셨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 지 알아야 고칠 것은 고치고,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지 않겠습니까" 라는 요지의 답장을 보내 드렸다.

    매스미디어는 복음선교사업에 있어서 더 없이 유용한 도구다. 교황 비오 10세(1835-1914)는 이미 100년 전에 "돈이 부족하다면 내 주교관과 목장을 팔아서라도 미디어를 통한 복음선교사업에 나서야 한다"라고 역 설하셨다. 서울대교구장 재직시절에 평화방송·평화신문 설립을 최종 승 인한 것도 이같은 확신과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교도사목에도 관여해 재소자들을 자주 만났다. 그 때 만난 사형수 최월갑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계 속>

    [평화신문, 제736호(2003년 8월 10일),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22
        『 사형수 최월갑과 희망원 』

1

        한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살고 싶은
        열망에 불타올랐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다.

        가톨릭 시보사 사장 시절 대구 희망 원 가족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김 추기경.
        사진제공=가톨릭 신문



    
    교수대 부러져 떨어졌는 데도 편안히 웃기만
    


    가톨릭시보사 사장 시절에 교도소엘 밥 먹듯이 자주 들락거렸다. 무슨 죄를 짓고 잡혀 들어간 게 아니라 재소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주일미사나 고해성사 때 재소자들을 대하고 있으면 '순백의 영혼' 같은 천사를 만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 사랑 안에서 다시 태어나려고 애쓰는 그들의 선한 눈빛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다.

    특히 고해실에서 그들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교도소) 밖에 있어 야 할 사람이 안에 있고, 안에 있어야 할 사람이 밖에 있는 것은 아닌 가'라며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들이 죄를 짓고 교도소까지 오게 된 사연을 눈물로 털어놓을 때는 '무전유죄 유전무죄(無錢有罪 有錢無罪)'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아 함께 울곤 했다.

    내가 재소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사집전과 고해성사가 전부였다. 이따금 돈이 생기면 그걸 소장에게 주고 "재소자들에게 고깃 국 한번 끓여 주라"고 부탁했다. 기름진 음식을 먹지 못해 얼굴이 늘 까칠까칠한 게 마음에 걸려 그랬던 것이다.

    재소자들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그들은 출소하는 날이면 나를 곧잘 찾 아왔다. 대부분 차비를 얻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럴 때면 "얼마 나 고생이 많았느냐.이제부터 마음 단단히 먹고 새 출발을 하라"면서 호주머니를 톡톡 털어 돈을 쥐어 줬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한결같이 차비가 가장 많이 드는 제주도나 강릉이 고향이라는 것이었다.어느 날 출소자라면서 사무 실에 찾아온 사람의 언행이 하도 수상해서 교도소에 문의했더니 출소자 중에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냥 돈을 뜯어낼 요량으로 찾아온 사기꾼이었다.

    그때부터 출소자가 찾아오면 항상 교도소측에 신원을 확인했는데 10명 중에 7, 8명은 그런 사람들이었다.그래서 아예 신문사 직원에게 차표를 직접 끊고 차 좌석에 앉는 것까지 보고 오라고 시켰는데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 때 만난 재소자들 가운데 최월갑이란 사람은 뇌리에 각인된 것마냥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는 살인강도죄를 짓고 사형선고를 받은 젊은 사형수였다. 개신교 신 자였던 그가 천주교로 개종하고 싶다고 해서 미사도 드려 주고, 수녀님 께 교리를 잘 가르쳐 주라고 특별히 당부까지 해 놓고 만났다. 그는 이 미 신앙 안에서 죄를 깊이 뉘우치고 용서받은 상태였다. 선하디 선한 눈빛만으로도 그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세례를 받기 직전에 사형 대에 서야 했다.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교도소로 달려가 그에게 조건부 세례를 주었다. 죽음을 앞둔 그는 놀라우리만치 평화로웠다. 오히려 다시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일상으 로 돌아갈 내가 울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선물로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 를 살려 내신 복음(요한 11, 38-44)을 읽어 주었다. 그는 천주교묘지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 기고 사형대로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쿵"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 소리는 심장에 꽂히는 비수(匕首)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주위가 쥐죽은듯 조용했다.

    그런데 잠시 후 간수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 내 옆에 있는 소장에게 뛰어왔다.

    "소장님, 월갑이, 월갑이가…." "왜 그래. 무슨 일인가?" "월갑이가 저 밑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어요."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야. 죽은 사람이 웃다니?"

    현장에 가 보았더니 그가 목에 밧줄을 걸고 정말 편안히 웃고 있는 것 이 아닌가. 나무로 된 낡은 교수기(絞首機)가 그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 고 부러져 아래로 함께 떨어진 것이었다.

    소장은 즉시 "사형집행 계속!" 명령을 내렸다.젊은 사람을 두 번 죽여야 하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난 애처로운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 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의 손만 꼭 잡고 있었다. 간수들이 사형 대를 고치는 것을 태연스레 보고 있던 월갑 이가 말문을 열었다.

    "미안해 하지 마세요. 전 괜찮습니다. 지금 죽는 것이 제게는 가장 복된 죽음입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믿음이 있으면 제 말을 이해하실 거예요."

    그리고 내게는 "제가 반시간쯤 후면 천당에 가 있겠네요"라며 날 위로 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두 번째 죽음도 편안하게 받아 들였다.

    다음날 시신을 인도받아 계산 동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봉헌했다. 미사 참례자들에게 내가 목격한 그의 죽음을 전하면서 부활신앙에 대한 강론을 했다. 그리고 유언대로 시신을 교회묘지에 안장했다.

    인간은 무수한 만남 속에서 살아간다. 돌아서면 금방 잊혀지는 만남이 있는가 하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만남이 있다. 난 40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와의 만남을 생생하게 기억한다.그가 죽음을 받아 들이는 자세와 부활신앙에 대해 많은 묵상거리를 남기고 떠났기 때문인 것 같다.

    또 그 무렵 행려 병자와 장애인들을 수용하는 시립 복지시설 '희망 원' 에 자주 들렀다.치료 한번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한 병든 사람들, 거리에 서 구걸하다 잡혀온 거지들, 손과 발이 뒤틀린 장애인들, 피를 토하면서 기침을 하는 폐병 말기환자들….

    그런 부류 사람들 1000여명이 열악하기 짝이 없는 시설에서 형편없는 먹거리로 연명하는 것을 보면서 '희망 원이 아니라 절망 원'이라는 생각 을 했다.

    그런데 그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어떻게 든 힘 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돈을 얻어다 갖다 주고,봉사활동을 하도 록 수녀 회와 연결시켜 주었다. 날이 갈수록 그들에게 마음이 끌렸다.

    가난하고 소외된 그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기 시작 했 다. 희망 원에 발길이 부쩍 잦아진 나를 발견하고는 한동안 갈등에 빠 졌다.

    '이들이야 말로 예수님 사랑을 가장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 아닌가. 그렇다면 이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그분의 사랑을 증거해야지 왜 머뭇 거리고 있는가. 그런데 이들과 똑같이 먹고 자면서 살아갈 용기가 있는 가….'

    이 고민을 몇 사람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 험한 일을 왜 시작하려 고 하느냐"면서 말리는 사람들 뿐이었지 용기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망설임 속에서 살아가던 어느 날, 교황대사님 전화를 받았다. "한 번 만나고 싶으니 서울로 올라오라"는 용건이었다. <계 속>

    [평화신문, 제736호(2003년 8월 10일),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갈멜 수도회 수도자들의 삶을 노래한/故 최민순 신부님의 아름다운 詩

  • 수평선

    여기 이곳에 함께 계시다는 생각이 들음은 그 고운미소 아름다운사랑
    우리들의 가슴에 한 송이 꽃으로 피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너그럽고 환한 미소의 추기경님,
    최민순 신부님의 아름다운 詩와 노래가 촉촉한 봄비에 그리움 젖게 하네요.

    2010-02-25 16:00:11 삭제


게시판 목록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조회수
382 미카엘 2010.03.07 2150
381 관리자 2010.03.05 1357
380 길을 걷다 2010.03.05 1493
379 나누미 2010.02.25 1350
378 Parsley 2010.02.25 1425
377 PAUL 2010.02.25 1357
376 로즈메리 2010.02.21 1417
375 출발천사 2010.02.18 1454
374 등대 2010.02.18 1279
373 수평선 2010.02.17 1196

하단 정보

[성당 개방시간] 05:30~21:00   [사무실 운영시간] 월 휴무, 화~금 09:00~19:00, 토~일 09:00~20:00, 법정공휴일 휴무

서울 용산구 이촌로81길 38   |   대표전화 02.796.1845 / 02.796.1846   |   혼인성사 안내 02.796.1847   |   팩스 02.790.5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