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는 어릴 때부터 가정교육이나 사회교육을 통해서 형성되고 강화된다. 모든 인간은‘사람 된 도리’로서,‘직장인의 의무’로서, ‘학생의 본분’으로서,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수행해야 할 책임과 역할 등을 끊임없이 요구받게 되고, 그러면서 페르소나는 강화되어 간다.
페르소나는 어떤 집단이 그 구성원들에게 만들어 준 틀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화폐처럼 특정 집단에 한해서만 유효하고 그 밖의 집단에서는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든가, 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든가 하면 한국 사회에서는 버릇없는 행동이라고 비난하지만, 서양 사회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사회마다 형성되어 있는 페르소나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 사회에 형성되어 있는 페르소나를 바탕으로, 입장과 시각이 다른 사람들도 포용해 가며 원만한 사회생활을 유지하게 된다. 즉, 페르소나는 개인의 본모습과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절충해 나감으로써 개인이 그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게 하는 밑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페르소나를 상황에 맞게 적절히 조절하지 못하면 오히려 유해할 수도 있다. 개인이 자신의 삶의 목표와 사회가 요구하는 페르소나를 동일시하여 그에 의존하여 살아가다 보면, 자기의 본모습을 잃게 되고, 그것이 극단적인 상태에 이르면 여러 가지 신체적, 정신적인 문제들이 생긴다. 융은 이러한 현상을 ‘페르소나의 팽창’이라고 불렀다. 페르소나가 팽창된 사람들은 심한 열등감과 자책감에 빠져 소외감을 느끼기 쉽다. ‘○○ 체면에 어떻게 그것을……’과 같은 심리가 강조되면서 페르소나가 하나의 속박이 되고, 거기에서 노이로제의 씨앗이 싹트게 된다.
그러므로 페르소나의 팽창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본성으로서의 삶과 페르소나로서의 삶을 구별하고 페르소나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한 노력을 융은 ‘자기실현’이라고 표현했다. 자기실현은 인간의 본모습을 짓누르는 사회적 역할에서 벗어나 그 본성이 살아 숨 쉴 때 가능해진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일 수밖에 없고,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요구하는 페르소나가 필요하다. 다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사회 집단이 요구하는 규격화된 태도와 역할에 지나치게 빠져 자기의 본모습을 잃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이부영의「페르소나는 버려야 하는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