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ON의 이해 - 동방교회의 부정(否定)신학
작성자 |길을 걷다
작성일 |2009.10.25
조회수 |1338
생명을 지음받은 피조물로서,
생명의 원천이자 무한하신 하느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도 오죽 답답하셨으면
인간과 같은 조건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셨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안된다고 가만있을 우리겠습니까.
어떻게든 하느님을 이해하려는 한 방법으로 '하느님은 무엇이다'라고 규정해보는 '긍정신학'을 써 봅니다만,
피조물의 관점에서 하느님을 규정하고 제한할 위험이 있음은 당연합니다.
부정 신학은 이러한 긍정 신학의 단점을 보충합니다.
즉 '하느님은 무엇이 아니다'라고 정의함으로써,
예를 들면 '하느님은 우연한 존재가 아니다' 라고 정의함으로써
긍정적인 규정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무한성을 서술하고자 하는 신학 분야입니다.
대표적인 분이 너무나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입니다.
아, 진도가 너무 많이 나갔습니다.
이콘을 이해해보자는 취지였는데 T. 아퀴나스라니..
동방교회의 이콘을 뒷받침하는 신학 하나가 바로 이 부정 신학입니다.
하느님은 '이러저러한 분이시다' 라고 하는 대신,
'이러저러한 분이 아니시다'로 접근하는 것이지요.
인간들이 하느님에 대해 알고자 연구하며 끊임없이 덧칠해왔던 것들을 하나씩 벗겨내다보면
오히려 하느님의 본질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 그럴듯하지요?
우리 자신의 경우와도 비슷합니다.
마음 저 깊은 곳에서의 원의는 아주 단순명료한데
그것을 이리 포장하고 저리 포장하여 결국에는 전혀 다른 '내'가 되듯이요..
오늘은 자꾸만 사설이 길어지는 날인가 봅니다. 이해해주시길...
각설하고..
이 부정신학에 근거한 이콘이란 결국,
인간의 사고와 세속적인 시각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성모님은 저렇게' 등으로 생각하던 것들을 지워나가다 보면
본연의 모습에 가 닿을 수 있으므로
사용되는 기법, 색, 모습 등을 엄격히 규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즉, 루벤스처럼 무엇을 그리고 무엇을 말하려는지를 즉시 전달해주는 즉각감동(?) 성화가 아니라
관조하며 그 내면으로 들어가야하는 길잡이로서의 기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다음에는 실질적으로 사용되는 여러가지 규정들과 상징에 대하여 씁니다.
**글은 이곳 저곳에서 퍼다가 이리 저리 조합했음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