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며 일하라”
- 성 베네딕도 -
(오창선 시몬 신부님)
1.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일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지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는 어려운 때이다. 한마디로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우리가 일한다. 테살로니카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2). ‘일한다’는 의미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생각이 생생히 드러나 있다.
물론 우리가 노동으로 얻고자 하는 그것은 단지 양식만이 아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우리에게는 양식 외에도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에게 양식은 보다 근본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마치 궤도를 이탈한 로케트처럼 모두가 오로지 ‘더 많이’ 차지하고 ‘더 크게’ 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형국이다. 이른바 ‘집단적’ 욕망 앞에서 모두가 무기력하기만 하다.
‘천박한 자본주의’라는 말이 있다. 요즈음은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의 힘겨루기”를 빗대어 ‘맹수 자본주의’, ‘고릴라 마케팅’이라는 말도 있다. 이러한 경쟁의 중심에는 단연 ‘재화적 가치’가 있다. 똑똑한 젊은이들이 이 단 하나의 가치를 위해 멀쩡한 진로를 바꾸는 것도 이제는 낮 설지 않는 세상이다. 어린 아이들도 그 길에 줄서도록 강요받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 모든 것에 대해 우리 사회가 지불하게 될 대가는 우리의 상상을 불허할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위의 편지에서 강조하였다: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다.’ ‘양식을 거저먹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고생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척박하고 고단한 삶의 환경 속에서도 당당함이 베어 나오는 말씀이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일자리가 있고 없음도 아니요 우리가 재화가치를 얼마나 많이 창출하느냐의 문제도 아니며, ‘인생의 신념’임을 사도의 편지는 말해주고 있다. 삶의 무게와 일상의 과제를 능가하는 인간의 품위가 있는 것이다. 고생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자유롭게 삶의 길을 헤쳐 나가는 사도 바오로의 당당함은 참으로 우리 시대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땀 흘려 열심히 일하는 이유들이란 대체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녀들을 교육시키며’ ‘편안한 여생을 보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사업을 하고 기업을 일구어 내신 분들에게는 여기에 사회적 책무성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소흘히 할 수 없는 이유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는 그 모든 이유들인가?
나와 가족에 대한 우리의 집념어린 그 관심과 사랑이란 결국 무엇인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것들’ 안에서 나는 어느덧 영원한 어떤 것을 갈망하는 나 자신을 만나고 있지 않는가? 내가 그것들을 위해 노심초사하고 땀 흘려 일하는 그 이유들마저 실상 우리의 삶이 ‘너무나 인간적인’ 것들로 끝날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바오로의 또 다른 편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 우리에게는 정신적 영적 품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이른바 ‘자아실현’의 진정한 의미이기도 하다.
2. 노동은 ‘멍에’인가 ‘기쁨’인가?
창세기에 보면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뱀의 꾐에 빠져 선과 악을 아는 나무 열매를 따먹는 크나큰 불충을 저지른다. 그들 때문에 마침내 땅이 저주 받았고 그 땅을 인간은 이제 ‘고통 속에서’ 부쳐 먹어야 하고 다시 ‘한낱 티끌’로 돌아가야 한다. 아담의 분신 하와 역시 ‘고통 중에’ 자식을 낳고 그를 섬겨야 할 처지가 되었다.(창세 3,16-19)
하늘과 땅을 지배하고 다스려야 할 인간의 영예로운 과업 ‘노동’이 그에게 ‘멍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에게서 그의 품위 곧 당신의 모상을 박탈하지 않으셨다. 멍에인 노동을 통해 그 멍에를 기쁨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길을 허락하셨다. 그래서 시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만난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126,5-6)
노동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노동은 이전 시대와는 달리 인간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한다. 현대 세계는 하나의 노동세계와 같다. 노동을 개념적으로 명료하게 정의 내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어쩌면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P. Ricoeur가 말하였듯이 모든 것을 의미하는 개념은 실상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도 살아갈 수도 없으니 인간에게 노동은 분명 개념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음이 분명하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환경이나 사회적 상황을 개척해 나간다. 하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끊임없이 당면한 요구들을 넘어선 어떤 ‘잉여적’ 욕구들을 생겨나게 한다. 처음에는 육체적 기본 욕구들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일하지만, 이 자연적 욕구 안에서 그 욕구를 이미 넘어선 어떤 욕구들을 경험하는 것이다. 언제나 ‘더 많은 것’, ‘더 큰 것’을 얻고자 하는 욕구가 노동을 통해 부단히 자신을 알린다.
이렇게 노동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경험한다. 하지만 그 자유 또한 온전히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은 늘 뼈저리게 경험한다. 노동은 우리가 그 안에서 인생의 비참과 위대함을 각별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인생의 한 현장이다.
현대의 노동은 실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노동 수단들의 발달로 노동은 육체적 노고의 부담을 덜게 되었지만,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노동 세계의 속도에 우리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 노동이 우리를 자유롭게 함과 동시에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3. “무엇이 인간의 가슴을 노래하게 하는가?”- 마틴 셀리그만
오늘날 노동의 가치는 그 어느 때보다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면 일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노동이 본래 고생스러운 것이며, 본디 인간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고정 관념이 참으로 뿌리 깊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늘날 노동을 압도적으로 경제적 시각에서 이해하려는 가치관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창의성 보다는 생산성이 강조되는 오늘날 노동은 인간의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우리는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정신적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설계하도록 세상을 향해 열린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아실현의 끊임없는 도전으로서 노동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노동과 인간의 삶의 이 역동적인 원초적 관계가 오늘날 일방적으로 거대한 노동 질서 안에서 특정 목표 아래 이루어지고 있다. 그 결과 인간의 창조적 노력의 산물이어야 할 노동이 피치 못하게 또 하나의 규칙성과 일상적 과정이 되고 있다.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은 자연 위축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날 노동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인간이 어떻게 삶과 노동의 원초적 관계를 복원할 수 있느냐라는 물음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노동 질서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언제나 노동자 그 이상이어야만 한다. 노동은 인간의 자아실현의 중요한 매체일 뿐이지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아실현은 노동 과정을 선행하는 것이며 언제나 그것을 능가한다.
그런데 ‘자아실현’이란 본래 역설적 개념이다. 왜냐하면 ‘자아실현’이란 나 외의 모든 것에로 곧 너에게로, 우리에게로 그리고 주변 세계의 것들에로 향하는 창조적 자기 전개를 뜻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기 부정’이요 일종의 ‘생산적 모순’인 셈이다. 이 생산적 모순을 소흘히 하는 사람은 노동이 선사하는 자아실현의 중요한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조로움과 방향 상실, 심지어 소외감에 의해서 두드러진 현대인의 노동 경험을 극복하고 노동을 자아실현의 기회로 복원시킬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노동과 인간의 소외 문제는 단순히 노동 조직의 인간화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그와 같은 노력이 참으로 성공하려면 인간의 주체적 활동의 성격이 명확히 규명될 필요가 있다.
노동이 생산성 증대를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오늘날 실적은 노동을 정당화시키는 기준이요 지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노동의 척도를 인간 자신과 그의 행복에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있는가? 우리가 일하면서 종종 경험하듯 즐거움과 기쁨은 오늘날에도 일한다는 것이 ‘자아 성취적’ 활동이 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실적 위주의 사고방식과 결별한다는 것은 물론 노동세계의 생산성 추구와 단절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이 어떻게 탐욕과 소유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함의 기쁨과 풍요로움을 일깨우게 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탐욕은 타락한 욕망이다. 욕망을 자극하는 갖가지 유혹이 넘쳐나고, “당신이 원하는 것은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 팽배한 현실에서 인간은 어느덧 “욕망하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더 많이 얻고자 하는 욕망”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니 탐욕이 예속 상태임은 분명하다. 욕망이 도달하여 만족할 수 있을 목표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하는 인간의 관심사는 실은 경쟁에서의 승리일 뿐이다. 탐욕은 결국 모두를 패배자로 만든다. “뿌리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그 유혹의 대가가 무엇일지 오늘의 세계 현실이 말해주고 있다.
이제는 “무엇이 우리의 가슴을 노래하게 하는가”(셀리그만) 물어야 한다. 물질적으로 더 가난하였음에도 행복했던 날들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탐욕 저편의 새로운 자유, 나눔”(G. 휠러)에 눈떠야 할 때이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의 일상적 노동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면서 변화시키는 새로운 시선이 요구된다. 세계에 대해 긍정하고 자신과 타인에 대해 긍정하는 내적 여유로움을 우리가 어디에서 구할 것인지 물어야 한다.
자신과 세계에 대해 긍정한다는 것,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 언제나 여유와 유머 감각을 견지한다는 것은 말만큼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 여유로움을 모른다면 우리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는 것이며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이라 할 수 없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였다. “재화를 올바로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 도대체 부끄러운 일이라 한다면, 여가를 즐길 줄 모르고 전쟁과 노동에는 열심이면서도 평화와 여가에서는 노예적으로 되는 것은 보다 부끄러운 일이다.”(정치학. VII. 1334a 36)
그러나 무엇이 우리를 그러한 부끄러움에서 지켜주는가? 무엇이 우리에게 진정 여유로움을 주는가? 타고난 낙천적 기질인가? 아니면 그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야’, ‘종국에는 그래도 다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게 해주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일과 기도의 조화를 가르쳤던 성 베네딕도의 가르침은 오늘에도 커다란 길잡이가 된다. 절대자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과 신뢰 없이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자신과 세계에 대해 긍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인은 수도자들에게 “일하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기도하며 일하라”(ora et labora)고 가르쳤다. 그러니까 일도 하고 기도도 하라는 뜻이 아니다. 모두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그 노동이 억압의 멍에이거나 끝 모를 탐욕과 욕구의 분출 수단이 되지 않도록 하느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숨결을 우리의 노동에 불어넣으라는 뜻이다,
4.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기도는 무엇이며, 우리는 왜 기도하는가?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찾고 그분 안에 머무는 것이다. 이것저것 다 해본 후에 마지막으로 기대할 것이 없어 하는 일이 기도가 아니다. 오히려 기도는 어머니 배속의 태아처럼 “우리를 하느님과 이어주는 생명줄”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기도를 잘 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시편의 말씀대로 우리의 뜻하는 바가 잘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주 저희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이 저희에게 잘되게 하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이 잘되게 하소서.”(시편 90,17)
중요한 것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하는가이다(1테살 5,17) 실상 “현세적 인간”은 제 능력으로는 “주님께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도하면서 우리는 어떤 도움을 얻는가? 첫째, 하느님의 시각으로 삶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둘째, 예수님께서 초대하시는 그 복된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기도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은 분명하다. 기도를 통해 ‘주님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세우신 계획을 완수하는 데에 필요한 은총을 받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 교우들에게 말하였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필리 4,6)
그런데도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그토록 어렵게 생각한다면 거기에는 어떤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묵시록은 이를 우리가 하느님을 향한 첫 사랑을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묵시 2,2-4)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도 우리가 신앙이 주어진 의무를 이행하는 그저 기능적인 역할로 그치고 말 때가 많지 않은가?
성경에 보면 잔치에 초대되었지만 오지 않은 사람들이 저마다 핑계를 둘러대다가 행운을 놓쳐버린 이야기가 있다.(루카 14,16-24) 저 마다 자기 자신의 관심사에 눈이 어두워 더 큰 관심사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내 삶에서 하느님의 초대는 어떤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5. 기도의 스승이요 모범이신 예수님
주님이신 예수님이 기도하실 필요가 있으셨는가? 그러나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몸소 기도하셨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죄 외에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다.(히브 4,15) 유혹과 시련을 이겨내는 단 하나의 길은 기도이다. 예수님은 유혹과 시련 가운데에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당신 삶의 중심에 두시기 위해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깊은 일치를 체험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필립보에게 “나를 보는 이는 내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하셨던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태초 이전부터 누리시던 하느님 아버지와의 신적인 본성의 일치만을 뜻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분의 천상 아버지와 완전하게 뜻을 함께하고 모든 것에 대해서 똑같은 정신과 똑같은 마음을 지니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완벽한 대리자이셨다.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은 이 구원의 사명을 더 깊이 체험하시고 그것을 이루어 낼 힘을 얻으셨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 또한 분명하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 라고 우리 또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는 제자들에게 저 유명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루카 11,1-4) 이 주님의 기도 안에 예수님의 관심사, 그분의 복음이 응축되어 있다. 그 핵심은 하느님 아버지가 우리의 갈망의 궁극적 목표임을 알린다. 이 단 하나의 목표 ‘하느님’을 향해 가는 인생 여정에서 또한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 알리며 성공적인 여정을 위해 도우심 청하라 하신다. 곧 매일의 양식과 용서와 보호를 청하라 하셨다.
우리가 이 기도를 정말 ‘예수님의 마음’을 담아 기도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천상의 아버지 하느님은 당신 아들의 사람이 된 이 지상의 자녀들의 간구를 결코 거절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때로는 약속의 지연으로 우리를 더 큰 믿음의 길에로 이끄시기도 하지만, 주님은 간절하고 신뢰에 찬 기도를 결코 거절하시지 않는다. 문제는 그 기도의 정신으로 일하며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믿음의 의지가 우리에게 있는가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셨다. 뿐더러 예수님은 또한 당신 자신이 몸소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라. 그러면 오늘 내가 들어가서 아버지께서 너에게 주기 원하시는 모든 좋은 것들로 너를 가득 채워 주겠다.”(묵시 3,20 참조) 기도하는 이는 주님의 말씀을 기꺼이 듣는다.
6. 신앙의 모범이요 도움이신 성모님
성모님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며 살아야 할지를 당신 삶으로 보여 주셨다. ‘마니피캇’이라고 일컬어지는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 우리는 성모님이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잘 알 수 있다.(루카 1,46-55) 이 노래의 첫 부분에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루카 1,46)라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표현되고 이어서 구원을 위한 핵심 원리가 드러난다. 곧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보다는 비천하고 겸손한 자들을 택하신다.’(1,52-53)
가브리엘 천사가 말하였듯이 성모님은 실로 ‘은총이 가득한’ 분이셨다.(루카 1,28) 하느님은 당신 아들의 어머니가 될 수 있도록 성모님의 전 존재를 당신 은총으로 온전히 채우셨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성모님은 “모든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신 분”이라고 불렀다.
긍정 심리학에 따르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3가지 요소들이 있다. 곧 기쁨(=존재의 현실에 대한 감사)과 참여(=자신이 관계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정)와 의미(=자신 보다 더 큰 것을 위한 열정)이다. 성모님의 노래에는 이런 요소들이 골고루 담겨 있다. 곧 구원자이신 하느님에 대한 기쁨과, 당신의 조상들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애정 어린 기억 그리고 하느님이 당신에게 하셨듯이 장차 세상에서 이루실 구원의 역사에 대한 갈망이 고백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마니피캇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마디로 성모님이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었다는 것과 하느님의 뜻을 삶 안에서 온전히 받들고자 했다는 것이다. 성모님처럼 우리 각자에게도 주님께 불러드릴 나만의 마니피캇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모님을 닮아 하느님이 이루시는 은총에 기꺼이 응답할 때에 하느님을 향한 나의 노래도 성모님의 마니피캇만큼 풍성해질 것이다. 이미 이 지상에서부터 우리가 성모님처럼 복된 삶을 이루어 나갈 수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성모님께 하신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에게도 인생의 여러 사건을 통해 말씀하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성모님처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느님의 완전하신 사랑의 계획에 비추어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맺는 말
유치환 시인의 “바위”로 오늘의 강연을 마칠까 한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깍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어떤 바위인가? 모든 것을 이겨내고자 하는 그 강인한 의지를 우리가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예수님은 폭풍이 불고 비바람이 들이닥쳐도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그와 같은 의미의 이름을 지어주셨다. 곧 베드로가 전해준 신앙의 바위 위에 우리가 서있도록 주 예수님은 우리를 초대하신다. 베드로가 교회를 통해 물려준 복음의 진리 위에 우리가 단단히 서있다면 이 세상 그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지옥의 권세도 이를 이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여러분 모두 힘들고 어려운 시절 신앙이 선사하는 이 힘과 지혜로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이겨내는 큰 바위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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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오창선 시몬 신부님은 독일에 유학하시어 철학박사를 받으신 후 혜화동 신학대학에 봉직하시며 신학대학 학장과 가톨릭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시고 현재 둔촌동 성당 주임신부님으로 계십니다. 항상 당신 자신에게는 엄격하시면서도 신자나 주위 분들에게는 따뜻하신 목자이십니다. 7년 전쯤에 신부님과 제가 미국 워싱톤 DC에 있는 대성전(Washington National Cathedral)을 방문했을 때 유서 깊은 대성당에서 저 하나를 신자로 앉혀 놓으시고 미사를 드려 주셨던 그 사랑을 잊지 못하지요... 신부님이 몇 달 전에 가톨릭경제인협의회 초청 조찬강연에서 발표하신 원고입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우리 홈피에 연초에 회사의 연간 계획을 밤늦게까지 세우면서도 정작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한 계획은 세우지 못했다며 아쉬워하며 자신의 일과가 너무 힘들다고 글을 올린 것이 기억납니다. 요즘 경제현장에서 노동 강도가 높아지며 일에 지친 형제, 자매님들 많습니다. 또한 평생 남편 뒷바라지, 애들 키우느라 아직도 고생하시는 자매님들 많지요. 잠시 신부님 글을 통해 위안을 받으시고, 이번 주말 주님 은총 안에서 편한 휴식 취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