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의미
아픔과 고통은 긴 인생여정에서 항상 만나게 되는 동반자이다. 또한 아픔과 고통은 우리 곁에 실제로 존재하는 죽음에 대한 은밀하고도 분명한 경고로 다가 온다. 죽음은 도망갈 수도, 피할 수도 없다. 우리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란 그 세월 풀과 같아 들의 꽃처럼 피어나지만 바람이 그를 스치면 이미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아내지 못한다”(시편 103,15-16).
우리는 죽음을 받아들입니까? 우리는 유물론적이고 속된 세상에서 금기(禁忌)로 간주되는 죽음의 진실을 감추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바로 거기에 있고,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 있다. 길거리에서, 병원에서,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 확실히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가장 준엄하고 격렬한 문제의 하나로 계속 남아 있다.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는 죽음이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죽음을 삶 자체로 이해하여야 한다. “삶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은 죽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Martin Gelabert). ‘사회적인 죽음’(모든 것으로부터의 격리와 고독)은 종종 생물학적인 죽음에 앞서 온다. 따라서 고통 받는 노인의 가족과 의료진은 이런 일이 생기도록 하면 안 된다. 특히 죽어가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기도와 성사로 지탱되는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죽기를 희망해야 한다. Teilhard de Chardin은 죽음을 성찬예식처럼 맞이하도록 가르침을 달라고 하느님께 빌었다.
죽음이란, 이 지상에서의 삶의 종말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보면 영혼이 몸과 분리되어 영원한 생명(마침내 생명은 영광스러운 형태로 몸과 영혼을 함께 갖습니다)에 대한 희망을 안고 거치게 되는 관문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죄가 죽음의 원인이기 때문에 죽음은 고통과 마찬가지로 ‘형벌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고통은 대개 죄에 대한 벌이 아니다(창세 2,15-17; 로마 6,23 참조).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적이고 영광스러운 죽음과 하나 되어 받아들여진다면 고통과 마찬가지로(로마 6,3-5 참조) 죽음은 구속(救贖)사업에 협력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은 ars moriendi(죽는 예술)이라는 풍요로운 전통으로 돌아가야만 하고, 죽음의 긍정적인 면을 창조적으로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 훌륭한 죽음에 이르는 길은 바로 선한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언행에서 너의 마지막 때를 생각하여라. 그러면 결코 죄를 짓지 않으리라”(집회 7,36). ...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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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어떤 훌륭하신 분이 외국 신부님 책을 번역한다고 하며 초벌 번역한 것의 내용과 표현을 고쳐달라고 하여 우리 집으로 이 일이 넘어 왔다가 일부 나에게까지 덤터기로 넘어와 처음에는 짜증이 났지만 읽다보니 피가 되고 살이 되어서 일부를 소개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