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가와 가라샤(細川ガラシャ)
일본 오사카에 가면 다마쯔꾸리(玉造)에 있는 주교좌 성당에 호소가와 가라샤의
석상이 있다. 성녀가 아니면서도 성녀같이 여기고 순교한 것이 아니면서도 순교
자 같이 추앙 받는 여인 이 여인에 대해 알아볼려고 한다.
그 녀의 본 이름은 다마코(玉子 또는 珠子)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살
해한 아케지 미쯔히데(明智光秀)의 셋째 딸로서 그녀의 본 이름은 아케찌 다마코
이다(일본도 명치유신 이전에는 여자가 결혼하더라도 처녀 때 성을 그대로 썻다
그러나 명치유신(1868년) 후에 가라샤를 추앙하기 시작하면서 호소가와 가라샤
라 하게 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아버지인 아케지미쯔히데가 혼노지(本能寺)에사 오다노부나(織田信長)를 살해
하고 모반을 이르켰을 때 남편인 호소가와다다오기(細川忠興)는 이에 반하여 아
케지미쯔히데의 토벌에 나서자 하루 아침에 사돈간에 원수가 되고 오도 갈데 없
이 자결해야할 처지에 놓이게 된 그녀를 남편은 특별한 배려로 깊은 산속에 유배
보내게 되는데 이곳에서 다마코는 시녀 마리아를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되고 도치
리나(Doctrin(독트리나)-포르투갈어로 교리)로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들게 되
어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신부의 관면을 받아 시녀
마리아로부터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가라샤(Glatia(그라시아)-라틴어로 은총)라
하였다.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사후(1598년) 도요도미가를 지킬려는 이시다미쯔나리(石
田三成)와 도꾸가와이에야스(徳川家康)를 받드는 편이 동서(東西)로 갈리어 세끼
가하라(関ヶ原)에서 결전을 갖게되는데 이시다는 상대 다이묘들의 처들을 오사
카성에 불러들여 인질로할려고하자 자기 때문에 남편의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
려한 가라샤는 자결할려고 결심 했으나 천주교신자로서 자결은 죄가 되므로 자
결하지 못하고 부하를 시켜 자신의 목숨을 끊게한다(목을 치게했다고도 하고 창
으로 가슴을 찌르게했다고도함-공명의 길이라는 NHK의 사극에서도 가슴을 찌
르는 것으로 나옴)
이러한 사실이 서양에 알려지자 1698년 에레오놀 막달레나(Eleonore
Magdalena)황후의 영명축일에 예수회 극장에서 오페라로 상연하게 되는데 이
때 일본의 무사도 또는 무가사회의 예법등을 알리 없는 서양에서는 야만적인 남
편군주의 비도덕적인 핍박에 견디지 못한 가라샤(그라시아)가 신앙을 지키기 위
해 목숨을 버리게되고 종국에는 폭군적 남편을 개심시켰다고 해석하게된다. 이
렇듯 미화된 가라샤의 이야기가 다시 일본에 들어와 순교성녀처럼 추앙하게된
것이다.
덧붙임: 가라샤에게 세례를 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는 에스파냐 마드
리드 출생. 예수회 선교사로 1577년 일본에 파송되어 전교사업을 하던 중, 1592
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가톨릭교를 탄압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
臣秀吉]가 일본 천주교도 1만 8000명으로 군대를 편성하여 출정시켰는데, 그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침략 선봉군 종군신부로 한국에 들어왔다가
이듬해 돌아갔다. 그후 침략군 철수 때에 잡혀간 한국 민간인 2,000여 명에게 세
례를 주고 신도로 만들었다.
고니시유키나가(세례명" 아우그스티누스)는 위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西군에 가담
패장이 되었는데 그도 천주교신자라 셋보꾸(切復-배를 갈라 자결)를 거부하고
처형되었다(고니시 유키나가는 본시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지만 유키니가는 성인이
된뒤 다가야마 우곤(高山右近)의 인품에 반하고 그의 권유에 의래 올간치노신부로
부터 세례를 받게 됨)
가라샤, 도치리나 등 일본식 외래 표기를 어떻게 표기해야할까 고민
스럽다. 그러나 그대로 옮겼고()안에 원어로 표기했으니 참고바란다.
또한 일본어つ를 우리나라 표기로는 쓰로 해야하나 음가가 너무 달라
그대로 쯔로 적었다 마찬가지로 か が등도 내나름대로 적었음을 밝힌다
시바료다로(司馬遼太郎의 역사소설 "関が原"(세기가하라)라는 소설에도
호소가와 가라샤의 이야기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