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여덜번째 이야기 ---
'자상한 아버지, 때론 짓궂은 친구같은 '인자하신 콧 님'
김천 성의중고교 제자들 가운데 김윤선이란 학생을 특별히 떠올리는
이유는 그가 뭇 남성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또 내 예상을 뒤엎고 수녀
원(예수성심 시녀 회)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내게서 세례를 받은 윤선이는 미모가 빼어난 데다 여학교 대대장을
맡았을 만큼 똘똘했다. 들리는 얘기로는 남학생들의 연애편지가 툭하면
집에 날아와 곤혹을 치르고, 동네 부잣집에서도 며느리 삼고 싶어 안달
했다고 한다.
어느 날 윤선이 친구가 내게 "교장신부님, 윤선이 같은 애가 수녀되면
참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수녀가 되면 좋지"라고 맞장구를 쳤지만
나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윤선이가 수녀원에 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독일 유학을 앞두고 성당 유치원 보조교사로 일하는 윤선이를 잠깐
만났는데 그 때 뜬 금없이 "제가 수녀원에 가면 잘 살 수 있을까요?"
라고 물어왔다. 나는 "물론 잘 살수있지. 그런데 네 부모님이 허락하시
겠느냐?"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후 교구장님 대신 예수성심시녀 회 종신서원
수녀들을 면담하러 간 적이 있다.
그 곳에서 수녀가 된 윤선이를 만났다. 제자 수녀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부활신앙에 대한 믿음이 무척 강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윤선이 동기 중에 박희순이란 학생이 있었는데 희순이는 훨씬 앞서 그
수녀 회에 입회했다. 박희순(마리요왕) 수녀는 70년대에, 김윤선(마리
요셉) 수녀는 80년대 중반에 수녀회 총원장까지 지냈다.
내게는 지금도 꿈 많고 웃음 많은 여고생들처럼 보이는데 수녀원에서는
벌써 원로 축에 드니 세월이 빠르긴 참 빠르다.
1년 남짓 교장을 맡는 동안 학생들과 격의없이 가깝게 지냈다.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대하고, 때로는 친구처럼 장난도
걸어서 그랬는지 학생들이 내게 '인자하신 콧 님'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내가 웃을 때면 코가 벌렁거린다나….
30대 중반의 젊은 교장이었지만 선생님들과도 별 어려움없이 학교를
꾸려 나갔다. 하지만 가난한 농촌이라 수업료를 제때 못내는 학생들이
많아 난감했다. 학교운영 책임자로서 선생님들을 통해 수업료 납부를
독촉한 적도 있지만 내 속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오죽하면 자식 학비
를 대지 못할까' 라는 생각에서 가난한 학생들에게 나름대로 관심을
기울였다.
더 힘들었던 것은 이따금 인근 학교 교장 선생님들과 모임을 갖는 자리
였다.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교장 선생님들이 둘러앉아 음담
패설을 주고받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이분들이 정말 교육자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한국교회에 소위 '밀가루 신자'라는 말이 생긴 것은 이 무렵이다. 전후
미국 주교회의 원조기구인 가톨릭 구제회(NCWC)는 엄청난 구호물자를
배에 실어 한국에 보내 주었다.
우리가 전후 폐허 속에서 굶주림의 고통을 그나마 덜 수 있었던 데는
가톨릭 구제 회 한국사무소 책임자로 와 계시는 안제오르지오 주교님
(메리놀외방전교회)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 밀가루.분유.의류
품 같은 구호물자는 교구를 거쳐 각 본당에 배급됐는데 내가 사목했던
안동본당과 김천본당에도 이따금 구호 품이 한 트럭씩 배달됐다.
성당에서 그런 구호 품을 신자, 비신자 가려 나눠 준다는 게 우스운
얘기지만 아무래도 성당에 나오는 신자들에게 먼저 돌아간 것은 사실
이다. 그러다 보니 구호 품을 더 탈 요량으로 믿음도 없이 입교해서
신자가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리
없었다. '밀가루 신자'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또 이 무렵에 한국교회는 어떤 의미로 소외를 당했다. 기세 높은 일본인
들이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정신적 공허와 가난에 시달리자 교황청은
이때를 일본 복음화의 호기로 삼고 인적, 물적 선교자원을 집중 투자
했다. 일본 복음화가 아시아 복음화의 단초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비오 12세 교황님은 세계적 선교회와 수도회에 서한을 띄워 일본에
진출할 것을 권고했을 정도이다.
그 바람에 선교회와 수도회들이 일본에 엄청난 수의 선교사를 파견하느
라 한국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실제로 내가 교구장님을 대신해 어느
수도회에 한국 진출을 요청한 일이 있었는데 "아시아에 새 선교 지를
정해 놓아 한국 진출은 곤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 때 섭섭한 마음
과 함께 '한국교회는 스스로 일어서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의 소외는 오히려 한국교회에 축복이 됐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 교세는 정체돼 있고, 자국 신부보다 외국 수도회
신부가 더 많다. 반대로 한국교회는 한국 신부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
로 많으며, 역동적 성장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 또한 하느님께서
한국교회에 내려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그 때까지도 단란한 가정에 대한 향수가 애련이 남아 있
었다.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가다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
르는 초가가 눈에 띄면 가슴이 설레고, 더러는 부럽기까지 했다.
'오두막 같은 저 집에서 일가족이 화목하게 살고 있겠지. 가족을 위해
하루 종일 땀 흘리고 돌아온 아버지는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고, 부인은
부엌에서 달그락 달그락거리면서 저녁상을 차리고, 아이들은 마당에서
깔깔대며 뛰어 놀고…. 저 집 가장은 얼마나 행복할까.'
사제 직을 저버리고 환속(還俗)할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석양에 물들
어 가는 초가, 그 곳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은 어린 시절
부터 동경(憧憬)한 풍경이다. 내 어릴 적 꿈은 읍내에 가게를 차려서 돈
을 번 후 25살쯤 장가를 가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다.
그 꿈도 그런 동경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겠다.
김천본당을 떠나 1956년 독일 유학 길에 올랐다. 한국교회가 성장하려
면 신부들이 그리스도 교 전통이 깊은 나라에 가서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교구장님께 청했더니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학교는
성베네딕도 왜관수도회에서 맡아주기로 한 덕분에 자유롭게 떠날 수
있었다.
배움에 대한 열정과 여비만 갖고 도착한 독일. 그 곳엔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계 속>
--- 열아홉번째 이야기 ---
낯설고 힘들어도 새로운 사실 깨우치는 재미 솔솔
1956년 10월, 배움의 열망을 가슴에 안고 독일에 도착했다.
뮌스터대학 요셉 회프너 교수신부님 밑에서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운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내가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
등을 정립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사람이 그 분이다.
그런 이론적 토대가 허술했더라면 70~80년대의 그 험난한 시기를 제
대로 헤쳐 나왔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얼마 전에 독일 의원들이 그분
의 학문 업적을 기리는 모임을 열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접한 적이 있
다. 참으로 훌륭하고 저명한 학자신부님이셨다.
회프너 교수님은 일본 상지대학 은사인 게페르트 신부님 소개로 만났다.
게페르트 신부님은 언젠가 "더 공부하고 싶으면 독일로 가거라"라고 말
한 적이 있다. 게페르트 신부님은 당시 서강대학교 설립을 준비하기 위
해 한국에 와 계셨다. 유학 문제에 대해 상의할 겸 신부님을 찾아뵈었다.
"요셉 회프너 교수를 찾아가서 배워라. 난 그를 만난 적도 없고, 그가
교수인지 신부인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그의 저서를 읽어보니까 사회학
이론이 매우 깊고 건전하다."
게페르트 신부님은 손수 추천서까지 써주셨다. 벨기에로 계획했던 유학
길이 독일로 바뀐 것은 그 때문이다.
지금은 유럽 대륙에 유학생이 많이 나가 있어 덜하겠지만 그 때만 해도
동양인 유학생의 고충은 한두 가지 가 아니었다. 뮌스터에 가기 전에
퀼른에서 두 달간 머물렀는데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바람에 무척 곤혹스러웠다. 한국인은 고사하고 얼굴 색이 노란 동양인
을 처음 보는 주민들이 대부분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버스에 오르면
어떤 사람은 화들짝 놀라기까지 했다. 그때 퀼른시 전체에 한국인은 두
세 명 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음식은 그나마 입에 맞았다. '품뽀니끄'라는 검은 보리 빵과 돼지고기를
구워 말려서 얇게 썰은 '신뽀니'라는 게 특히 먹을 만했다. 그러나 '한국
토종'인데 김치와 된장국이 왜 그립지 않겠는가. 수녀원에서 방 한 칸을
얻어 살고 있을 때, 비가 내려 날씨가 음산한 날이면 김이 모락모락 나
는 밥과 된장국 생각이 간절했지만 독일 저녁식사는 대부분 찬 음식이
었다.
그런 날 학교에서 세미나까지 마치고 늦게 돌아오면 식탁에 차려 놓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내 방에 가서 캠핑용 버너에 불을 붙여
밥을 짓곤 했다. 반찬이라고는 조선간장 비슷한 '막'이라는 게 있어서
거기에 양파를 썰어 넣어 만든 양념간장이 고작이었다. 하얀 김이 피어
오르는 쌀밥에 '막'을 붓고, 그 위에 생 계란을 풀어 쑥쑥 비벼 먹는 하
숙방 저녁식사….
그 동안 여러 자리에 초대받아 온갖 음식을 다 맛보았지만 그 시절 한
손으로 책장을 넘겨 가면서 떠먹은 밥 보다 더 맛있는 밥은 먹어 본 기
억이 없다. 내 평생 내 손으로 밥을 지은 기억은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출타하고 안 계서서 형과 함께 밥을 해먹은 것과 학병시절에 중대 취사
병으로 근무할 때, 그리고 독일 하숙생 시절이 전부이다.
독일어가 서툴러서 어느 수녀님한테 야단(?)을 맞은 적도 있다. 수녀원
아침미사를 집전하기로 하고 오전 7시30분에 자명종 시계를 맞춰 놓고
잠들었는데 이른 아침에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군가 싶어 나가
봤더니 수녀님이 잔뜩 화가 나서 "왜 6시반 미사에 나타나질 않느냐"고
따졌다. 6시반? 독일어는 6시반을 '반7시(할프 지벤 halb sieben)'라고
표현하는데 그걸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그 바람에 미사시각도 못 지키
는 게으른 신부가 돼 버렸다.
그런 어려움을 겪다 보니 '외국생활이란 게 이렇게 힘든 것이구나'라고
새삼 깨달았다. 그제 서야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 선교사 신부님들의
고충을 조금이나 헤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점은 전공 공부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리스도
사회학'은 신학부에 속해 있어서 교의신학·윤리신학·교회법·성서 등 신
학과 성서 전반을 다시 새롭게 공부해야 했다. 특히 한국에서 성서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배워 가면서 신
구약 성서를 익히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도교수님은 내게 '한국 가족제도'를 연구하고,
그 주제로 논문을 쓰라고 권유했다. 문제는 그에 관한 기초자료를 구하
는 것이었다. 한국에 있는 자료는 순전히 한문으로 되어 있고, 영어와
불어자료는 조금 있지만 독어자료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한국 가족
제도는 유교 전통이 깊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면 유교 경전도
독해할 줄 알아야 했다. 그러려면 내 한문 실력 갖고는 어림없는 일이
었다. 아쉬운 대로 불어자료라도 참고하려면 새로 불어를 배워야 했다.
이 때문에 머리에서 쥐가 날 지경이었다.
결국 지도교수님께 찾아가 "이 주제로는 도저히 논문을 못쓸 것 같으니
바꿔 달라"며 백기(白旗)를 들었지만 교수님은 요지부동이었다.
지도교수님은 원래 어느 학생에게든 지 출신 국 가족제도를 연구하라고
주문하는 분이었다.
그래도 새로운 사실을 하나하나 깨우쳐 가는 재미만큼은 쏠쏠했다.
초기에는 강의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강의내용이 서서히 귀에 들어오자 마치 새로운 세계가 열
리는 것만 같았다. 신학교 시절에 배운 것보다 훨씬 앞선 내용을 접할
때는 '한국은 멀어도 한참 멀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요소는 수없이 많지만 배우는 기쁨도 어느 것에 뒤지지
않는다.
한창 공부 재미에 빠져 있던 그 즈음에 예기치 않은 돌발사태가 발생했
다. 유학생활 3년째로 접어들었을 때이다. 대구교구 서정길 주교님이 독
일교회 초청을 받아 오시는데 비행기에서 덜컥 감기에 걸려 경유지 파
리에서 심한 고열에 시달리셨다. 독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폐렴으로
악화된 상태였다.
그 바람에 서 주교님은 독일 시립결핵요양원에서 넉 달 동안 입원해
계셨는데 그 때 본의 아니게 비서역할을 해야 했다. 한국교회에 물심양
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는 오지리(오스트리아) 부인회도 서 주교님을 기
다리고 있던 터라 서 주교님을 다시 빈에 있는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여러 달 동안 병 수발을 들었다. 다행히 주교님은 2년 후 쾌차해 귀국
하셨다. 중간에 다른 신부가 와서 교대를 해주기도 했지만 꼬박 2년 동
안 공부를 뒷전으로 미뤄 놓고 주교님을 모신 셈이다.
주교님이 떠나신 후 다시 뮌스터 대학 교정으로 돌아왔다. 새롭게 출발
하는 마음으로 학업에 정진하려고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그러나 차분
하게 앉아서 공부할 팔자(?)는 아니 었 나보다. 여기저기서 나를 찾는
전화와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계 속>
[평화신문, 제736호(2003년 8월 10일),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 스무번째 이야기 ---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20 『 독일 유학생 시절(下) 』
한국에서 온 광부와 간호사,수녀들이 나를 찾는 바람에 가뜩이나 힘든 공부가 자꾸 지연됐다.
독일 탄광촌에서.(뒷줄 가운데가 김 추기경)
|
현지 체험들, 훗날 사목자로서 소임수행에 큰 도움
다시 뮌스터대학으로 돌아와 공부하고 있을 무렵에 한국인들이 독일로
물밀듯 밀려왔다.
한국 정부가 서독으로부터 상업차관을 얻기 위해 간호사와 광부를 송출
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라인강의 기
적'을 이룬 서독은 노동력이 부족해 광산·병원처럼 고된 사업장에는 외
국 노동력을 수입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한국에 진출한 독일 계통의 분도회 에서도 어학과 간호학을 공부 시키
느라 수녀와 수사들을 독일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성베네딕도회 왜관수
도원의 한 독일인 신부님은 독일 가정에 입양시키기 위해 한국에서 고
아들을 데려왔다. 그야말로 아이들을 여기저기에 던져 놓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한국인 신부가 거의 없다 보니 이들이 툭하면 나를 찾는 것이었
다. 고해성사와 미사는 물론이고 갑자기 어려운 일에 부닥치면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부를 한다고 해도 "도와 달라",
"꼭 와 달라"는 동포의 간청을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한인들에게 '김수환 신부'가 입 소문이 났던지 나를 부르는 전화와 편지
가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학업에 지장이 많았지만 어려운 사람을 보
고 가만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 웬만하면 요청에 응하려고 했다.
한국 여성이 세계 어느 나라 여성보다 강인하다는 사실은 그 때 새삼
깨달았다. 한국 간호사들의 헌신적이고 억척스런 일솜씨는 현지인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었다. 간호사들은 생활비를 거의 안 쓰다 시피하면서 월
급을 고스란히 가족에게 송금했다. 그 중에는 대학에 진학해 의사나 문
학박사가 된 사람도 있었다.
유학시절에 보고 겪은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가톨릭교회
가 창문을 활짝 열어 새 바람을 맞아들이고, 쇄신을 통해 시대변화에 적
응하려는 '희망의 대역사(大役事)'이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소집하면서 시대적응이란 뜻의 '아죠르나멘
토(aggiornamento)'라는 단어로 그 의미를 설명하셨는데 이는 순식간에
전 세계 교회의 유행어가 됐다.
가톨릭 교회에 변화와 쇄신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감지했다.
비록 신문과 방송을 통해 공의회 진행소식을 접했지만 예전에 느껴 보
지 못한 강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독일 신부들과 공의회에 대해 토론하
면서 많은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한 체험은 내가 신부로서 뿐만 아니
라 훗날 주교와 추기경으로서 소임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 무렵 교황 요한 23세가 나를 울린 일은 잊을 수가 없다.
어느 날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는데 영화가 슬퍼서 운 것이 아니라 영
화가 시작되기 전에 나오는 뉴스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교황님이 추
기경과 주교들을 이끌고 공의회장에 입장하는 장면이었다. 기도에 열중
하고 계신 교황님 얼굴이 화면에 비친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감동의 눈물이었다. 성령께서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교황님과
함께 하고 계시 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극장에 가서 영화가 아니라 뉴스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면 사람들
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1958년 요한 23세(원명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가 77세 고령에 교황직
에 오르자 교계와 언론에서는 '과도기적 교황'이라고 표현하는 데 주저
하지 않았다. 워낙 고령이다 보니 큰 기대를 거는 것 같지 않았다.
전임 교황 비오 12세가 수려한 귀족적 분위기였다면 이분은 털털한 시
골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후임교황 물망에 오를
만한 젊고 유능한 추기경들을 많이 임명해 주는 것 외에는 기대할 게
없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 변화와 쇄신, 그리스도교
일치, 세상 및 타 종교와 대화하는 교회를 꾀하셨다. 어느 누구도 그러
한 용단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과도기적 교황'이라는 신문
제목이 적중하기는 했다. 젊은 새 교황을 기다리면서 임시로 직책을 수
행하는 교황이 아니라 전통과 관습을 뛰어넘어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교회를 이끈 교황이 되셨다는 말이다.
특히 요한 23세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담은 (지상의 평화), (어머
니요 스승) 등 8개 회칙을 발표하셨다. 이 두 회칙은 지금도 교회 안팎
에서 '평화의 교과서'라고 불릴 만큼 내용이 뛰어나다.
요한 23세는 공의회 회기 중인 1963년 운명하셨다. 교황님이 위독하다
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는 바티칸 방송에 주파수를 맞춰 놓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라디오를 틀 곤했다. 내 마음은 로마에 가 있었다. 이탈
리아 공산당 유력기관지조차도 그분의 부고(訃告)기사에 "세계의 목자
가시다"라는 제목을 달아 업적을 기렸다.
독일은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나라이다. 내가 관찰한 독일 국민성은 질
서, 근면, 철두철미다. 이는 일본 국민성과도 유사한데 한가지 특징을 더
말하라면 집단주의를 꼽고 싶다.
어느 날 술에 흥건히 취한 사람들이 민요를 합창하면서 줄맞춰 걷는 모
습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다. 맥주집에서 나온 취객들이 한치
흐트러짐도 없이 군가 풍 민요에 발을 맞춰 걷는 질서의식과 집단의식
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이튿날 독일 신부에게 "독일인에게는 군국주의
의 피가 흐르는 것 같다"고 말했더니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가뜩이나 힘겨운 전공 공부는 요셉 회프너 지도교수님이 주교로 임명돼
뮌스터교구장으로 떠나시면서 난관에 부닥쳤다. 덧붙이면, 회프너 주교
님은 1969년 나와 함께 추기경에 임명됐다. 더구나 내 임명순서가 조금
빨라 교황님께 먼저 임명장을 받았다. 그 때 스승님께 고개를 숙이고
"정말 죄송합니다"라며 백배사죄(?)한 기억이 난다.
아무튼 후임 지도교수는 아무리 기다려도 배정되지 않았다. 신학과 사회
학을 공부하면서 '한국 가족제도'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것도 버
거웠다. 난 고민에 빠졌다.
'이러다가는 10년이 넘어도 공부를 마칠 수 없겠는걸. 무작정 책만 붙들
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박사가 되는 것보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
돌아가 일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가겠다'는 생각을 교구장님께 말씀 드렸다.
<계 속>
[평화신문, 제736호(2003년 8월 10일),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갈멜 수도회 수도자들의 삶을 노래한/故 최민순 신부님의 아름다운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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