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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연재 16, 17)

작성자  |출발천사 작성일  |2009.03.23 조회수  |2876


--- 열여섯번째 이야기 ---



순박한 교우들과 눈물의 이별하고 대구로
어머니가 그토록 신신 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당 회장님이 소개해 준 젊은 부인을 식복사로 들여 몇 달을 아무 탈 없이 살았다. 남편이 전장에 나가 있어 홀로 안동으로 피난 내려온 새댁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본당에 와서 머무시겠다는 기별이 왔다. '어떻게 하지…. 젊은 여자를 절대 식복사로 들이지 말라고 하셨는데. 어머니가 아시면 무척 상심 하시겠는걸. 아냐, 그래도 어머니가 와 계시면 남들 보기에도 좋을 것 같다.' 성탄절을 앞두고 어머니가 오셨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한 달 동안 식복사에 대해 일체 말씀이 없으셨다. 그냥 무사히 넘어가는 것 같아 내심 마음을 놓았는데 어느 날 낯선 부인이 사제관에서 밥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여쭸더니 어머니는 "새댁이 아프단다"라고 태연스럽게 말씀하셨다. 낯선 부인은 새댁이 몸을 추스리는 동안 잠시 와 있는 줄로 알았다. 며칠 후 내방 창문을 통해 그 새댁이 시내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아프다는 사람이 멀쩡하네'라고 중얼거리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어머니께 다시 여쭸더니 어머니께서 그 새댁을 내보냈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그래도 그렇지 홀홀 단신 피난 온 아낙네를 무작정 내 보내면 당장 뭘 먹고 살아요? 제가 본당신부입니까, 어머니가 본당 신부입니까?" 할 수 없이 다음날 그 새댁을 불러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수중에 있는 것을 몽땅 털어 주었다. 결국 '젊은 식복사 소동'은 그렇게 해결되었다. 그 후 남편에게 소박맞은 일본 여자를 식복사로 들인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아기 둘을 데리고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일본으로 돌아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타이르고 수중에 있는 돈을 톡톡 털어 준 적이 있다. 본당사목에 한창 재미를 붙이는가 했더니 교구 장 비서로 발령 (1953년 4월)이 났다. 나는 안동본당(현 목성 동 주교좌 본당)에서 신자들과 동고동락하는 1년 반 동안 '소박한 꿈'을 꾸고, 그 꿈을 키웠다. 나 자신을 온전히 바쳐 신자들의 영혼구령은 물론 가난까지 구제하겠다는 꿈이었다. 어디 가서 돈을 끌어다 일자리를 만들어 주면 삶이 신앙이고, 신앙이 삶인 가족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이 들대로 든 순박한 교우들의 눈물과 그 꿈을 뒤로 하고 대구로 왔다. 대구대목구장 최덕홍 주교님(1902~1954)은 내게 아버지 같은 분 이시다. 나를 어릴 때부터 알고 계시던 분이라 당신이 입던 옷을 곧잘 물려주시고, 내가 실수를 하면 스스럼없이 "바보같은 녀석!" 이라고 혼을 내셨다. 워낙 아버지 같은 분이셨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야단을 쳐도 전혀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한 번은 최 주교님이 주신 돈과 양복을 도둑맞은 적이 있다. 분명히 방문을 잠그고 주교님과 식사를 하러 나갔는데 돌아와 보니 도둑이 홀랑 털어 가 버렸다. 그 바람에 주교님께 "바보같은 녀석"이라는 소리를 또 들었다. 비서 역할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주교님이 대구지역에 주둔한 미군부대를 방문하시면 짧은 영어실력 으로 통역을 하고, 외출 때면 가끔씩 수행하는 정도였다. 특히 최 주교님은 혼자 다니시는 경우가 많아 내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고등학생 단체 지도신부를 자임했는데 현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가 그 때 경북고등학교 학생이었다. 하루는 견진성사에 다녀오시는 최 주교님의 안색이 황달(黃疸) 환자처럼 누렇게 뜨고 몹시 피곤해 보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해성 병원이라는 작은 병원으로 모시고 갔는데 시간이 조금 흐르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공군 군의관으로 대구에 내려와 계신 박병례 박사(성모병원 초대원장)를 비롯해 내노라 하는 의사들이 병원을 급히 들락거렸다. 주교님 병실에서 나오는 의사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어두웠다. 의사들이 암(癌)인 것 같다고 내게 살짝 귀띔해 주었다. 난 암이라는 병명을 그 때 처음 들었다. 주교님은 밤이 되면 무척 고통스러워하셨다. 박병례 박사는 "좀 더 확실하게 알려면 개복(開腹)을 하는 수 밖에 없는데 수술 도중에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말했다. 수술을 하려면 주교님께도 그 사실을 알려야 했는데 차마 주교님 면전에서 그 말씀을 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교구 원로 신부님들도 고개를 저으셨다. 결국 내가 병실에 들어갔다. "주교님…. 주교님. 저… 암진단이 나왔습니다. 의사들 말이 수술을 받으면 괜찮다고 합니다. 만의 하나 모르니까 유언을 남기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주교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눈물을 주르르 흘리셨다. 그리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난 50대의 건장한 주교님께 유언을 하라고 말씀 드리는 것이 무척 괴로웠다. 처절한 느낌까지 들었다. 나를 절대적으로 신임했던 주교 님은 다른 신부들을 제쳐 두고 내게 교구 재산내역을 알려 주면서 그걸 책임지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병이 워낙 깊었던 탓에 주교님은 수술 후 며칠을 못 버티시고 54년 12월14일 영면하셨다. 그분의 비서인데다 내게는 아버지 같은 분이 셨기 때문에 상주(喪主)같은 심정으로 장례를 치렀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머니 병세가 심상치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주교관 담벼락 뒤에 있는 번지도 없는 낡은 집을 수리해서 모시고 살았는데 중풍에 걸려 몇 달간 고생을 하셨다. 어머니는 평소 "나는 사순절 둘째 영복날 죽으련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당시 신자들은 묵주기도 묵상주제인 환희·고통·영광을 갖고 월요일을 '첫 환희', 화요일을 '첫 통고(고통)', 수요일을 '첫 영복 (영광)', 목요일을 '둘째 환희'라고 불렀는데 둘째 영복 날은 토요일이 되는 셈이다. 일부 신자들 사이에서 사순절 둘째 영복 날 죽으면 천당에 간다라는 속설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걸 믿으시고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바로 둘째 영복 날, 어머니는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셨다. 그 불편한 몸으로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내리더니 그걸 갖고 성당으로 걸어 가셨다. [평화신문, 제736호(2003년 8월 10일),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 열일곱번째 이야기 --

        『 내 무릎에 기대어 눈을 감으신 어머니 』





<사진설명>어머니는 한평생 고단하게 사시다가 내 무릎에 기대어 눈을 감으셨다. 장지에서 하관식 예절을 거행하면서 어머니의 천상 영복을 빌었다.(김 추기경 왼쪽은 김동한 형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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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아구나'라는 생각에 어린애처럼 두려워

난 아무래도 불효자식인 모양이다. 어머니 사랑을 독차지한 막내아들인데도 막상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TV 드라마를 보다가 이따금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 눈물이 없는 사람은 아닌데….

내 딴에는 어머니 임종을 조용히 준비했다. 대구교구청 담벼락 뒤에 있는 낡은 집을 구입한 이유도 남의 셋방에서 큰일을 치를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언제 큰일이 닥칠지 몰라 식량과 땔감도 충분히 장만해 두었다.

어머니는 그 날 낮에 당신 방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떼어 갖고 2~3분 거리에 있는 남산동 성당으로 가셨다. 중풍이 든 불편한 몸이었기 때문에 10분 남짓 힘겹게 걸으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십자가를 손에 꼭 쥐고 예수님께서 걸으신 수난의 길을 따라 성로신공(聖路神功, 십자가의 길)을 바치셨다. 불편한 다리로 한 걸음 한 걸음 뒤따른 예수님의 수난길…. 그것이 평생 기도 속에서 사신 어머니의 마지막 기도였다.

어머니는 때마침 성체 조배 중이던 프랑스 유 신부님께 총고해(평생 지은 모든 죄를 뉘우치며 고백하는 것)를 하고 집에 돌아오셔서 저녁식사까지 잘 드셨다. 그리고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교구 청에서 뛰어온 이 막내아들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시고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는 참으로 죽음을 잘 준비하셨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들으셨던지 그 날 그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성당에 가서 성로신공과 총 고해까지 하시고 눈을 감으셨으니 말이다. 내가 그토록 사랑한 어머니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어머니는 살아 생전에 "말띠 여자는 팔자가 드세다"고 말씀하셨는데 일흔 두 해를 정말 고단하고 험하게 살다 가셨다. 옹기장수에게 시집와서 가난을 뼈저리게 겪으시고, 방랑벽이 있는 큰아들을 찾느라 3번씩이나 만주 일대를 헤매신 어머니, 말이 아니라 기도로써 이 아들이 성덕을 갖춘 사제가 되기를 비셨던 어머니….

밤늦게 시신을 모신 방에 홀로 남아 신산(辛酸)했던 어머니의 한평생을 더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이제 고아가 됐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내 나이가 32살이었는데도 마치 어린애가 부모를 잃었을 때 느낄 법한 두려움과 외로움이 엄습했다.

모든 어머니의 자식사랑이 다 그렇겠지만 이 세상에서 어머니만큼 나를 사랑해준 사람은 없다. 난 고린토 1서 13장 '사랑의 송가'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 세상에서 그 완전한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이 어머니의 사랑, 특히 내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시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다 받아 주시고, 어떤 허물과 용서도 다 덮어 주셨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말이 '사랑'이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어머니가 보여 준 사랑처럼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믿고 바라고 견디어 내는'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했다.

효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안동과 대구에서 몇 년 동안 어머니를 모시고, 마지막 날 임종을 지킨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어머니에 대한 정으로 말하자면 형님(김동한) 신부가 더 깊었을 텐데 형님은 그 때 군종 신부로 나가 있어서 임종조차 지킬 형편이 안됐다.

어떻게 보면 하늘같고 바다같은 어머니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라고 하느님께서 내게 특별히 기회를 허락하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교구 장 비서로 일하면서 해성 병원 원장 직을 맡은 적이 있지만 서류상 책임자였을 뿐 실무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이어 1955년 6월 김천본당(현 황금동본당)으로 발령받았다. 김천본당은 역사가 깊은 데다 유치원과 성의중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어서 무척 바빴다.

그러고 보면 신부된 지 4년 밖에 안되고, 본당사목이라고 해 봐야 안동본당(현 목성동주교좌본당)과 김천본당을 합해 3년이 채 안 되는데도 그 사이에 온갖 감투를 다 써보았다. 주임신부, 교구 장 비서, 병원 장, 재경부장, 유치원장, 중고등학교 장… 교구참사로도 잠시 일했으니까 그 나이에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본 셈이다.

김천본당에 부임해 자연스럽게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직을 맡게 되었는데 학생들과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한 기억이 새롭다. 성의중고교는 전임 최재선 신부님(현 부산교구 은퇴주교)이 옛날부터 내려오던 교육시설을 중고등학교로 인가받아 기초를 닦은 학교다. 그래서 나는 좋은 전통을 만들어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는 젊은이가 되라고 학생들에게 신신 당부했다.

특히 여학교 교사(校舍)가 성당 마당에 있고, 사제관을 교장실로 겸용하는 통에 눈을 뜨고 나면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여학생들이 사방 천지였다. 난 여학생들에게 장난도 곧잘 쳤는데 학생들은 자상한 아빠를 대하듯 나를 따랐다. 어느 날인가 마당에서 여학생들과 장난을 치며 놀고 있는데 수녀님이 "학생들과 장난치면서 노는 교장이 세상에 어디있느냐?"며 슬쩍 눈을 흘긴 기억이 난다.

그때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나를 무척 따르고 서로 정이 깊게 들었다. 여학교 제1회 졸업식 날, 졸업생 40여명이 집에 돌아갈 생각은 안하고 내내 울기만 하다 결국 사제관에서 잤다. 자기네들끼리 헤어지는 것이 섭섭해서 그랬겠지만 말이다.

요즘도 초노(初老)의 나이에 접어든 1회 졸업생들과 일년에 한 번 정도 만나서 옛 추억에 잠기곤 한다. 나를 생각해주고 위해주는 그들을 보면 친딸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하느님은 이런 식으로도 홀몸으로 사는 성직자에게 혈육의 정까지 선물해주시는 것 같다.

제자들 가운데 김윤선이란 학생이 있었다. 인물이 무척 빼어난 데다 여학교 대대장을 맡아 남학생들 사이에서 요즘말로 '인기 짱'이었는데 그 제자가 뭇 남성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수녀 회에 입회한 얘기가 재미있다.

<계 속>

[평화신문, 제736호(2003년 8월 10일),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 갈멜 수도회 수도자들의 삶을 노래한/故 최민순 신부님의 아름다운 詩♣

  • nittany

    \"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말이 \'사랑\'이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어머니가 보여 준 사랑처럼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믿고 바라고 견디어 내는\'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했다.\" 김수환 추기경님 어머님 사진을 본적이 있다. 작은 키에 참으로 고생 많이한 얼굴 모습이었다. 어느 어머님인들 사랑이 깊지 않은 분이 있겠는 가.. 하지만 어머님 사랑을 진정 받아들이고 느끼신 추기경.. 다시 존경하게 된다. 그리고 깊은 신앙으로 마지막 이세상 떠날 준비를 하신 어머님의 모습에서 어머님의 깊은 믿음이 추기경님께 내려간 것이라 생각된다.

    2009-03-24 07:00:18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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