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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연재: 13,14,15)

작성자  |출발천사 작성일  |2009.03.22 조회수  |1518

---- 열 세번째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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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수속 밟던 로마 유학 '물거품'

27일 밤 인민군이 미아리 고개까지 밀고 내려왔다. 신 학생을 대표하는 총 급장으로서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일단 신 학생들과 명동성당으로 뛰었다.

명동성당도 우왕좌왕하고 대책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난 몇 명과 구 천우 신부님이 계시는 삼각지성당으로 가서 잠자리를 얻었다.

얼마쯤 눈을 붙였을까…. 요란한 폭발음을 듣고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면서 "인민군이 시내까지 들어왔다"고 소리쳤다. 부랴부랴 밖에 나가 보니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이른 새벽 거리에 피란민 들과 차량들이 넘쳐 났다. 한강다리는 이미 새벽 2시경에 끊어졌다.

공포에 휩싸인 피란민 들은 거대한 물결이 출렁이듯 왼쪽으로 밀렸다, 오른쪽으로 밀렸다 하면서 갈팡질팡했다. 북쪽으로 올라간 피란민 들은 인민군이 위쪽 강나루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는 방향을 틀어 다시 내려왔다. 다행히 끊어지지 않은 철교가 하나 남아 있어서 그 다리를 건너 수원으로 갔다.

급히 서울을 빠져 나온 신 학생들은 수원성당에 모여 하룻밤 신세를 졌다. 그 다음날 신 학생들을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남쪽으로 내려 보냈다. 본당 신부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 후 나도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혼자 남아 훌쩍이고 있는 소신학생이 보였다. 난 그 때 차(次)부제 품 시절이라 어린 소신학생들과는 차이가 많이 났다.

깜짝 놀라서 "넌 왜 안 갔니? 고향이 어딘데?"라고 물으니 문산 이라고 대답했다. 경남 진주에 문산 이라는 곳이 있어서 그 쪽 방향인 줄 알았더니 이미 인민군 수중에 들어간 경기도 문산 이라는 것이었다. 전날 저녁에 소신학생 한 명을 데리고 다니다가 인파 속에서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터라 그 꼬마 손을 꼭 잡고 수원 역으로 나갔다. 그 꼬마가 누구인가 하면 바로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다.

수원 역에 도착했더니 뒤쳐진 소신학생 너 댓 명이 모여 있었다. 우리 일행은 저녁이 다 되어서야 남쪽으로 내려가는 화물열차 지붕에 올라탈 수 있었다.

"너희들 졸면 큰일난다. 여기서 졸다 떨어지면 죽는단 말이야. 조는 사람이 있으면 옆 사람이 꼬집어서 깨워야 한다. 알았지!" "예."

소신학생들을 데리고 오른 피란길이라 걱정은 됐지만 다행히 큰 어려움 없이 대전까지 내려갔다. 그 곳에서 주머니를 톡톡 털어 밥 한끼씩 사먹은 후 다시 조를 짜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난 소신학생 최창무와 함께 대구까지 내려갔다.

전쟁은 반드시 피해야 할 비극이다.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 수많은 인명이 무참히 쓰러지고, 교회도 큰 피해를 당했다. 내 은사인 공베르 신부님을 포함해 서울에 남아있던 상당수 성직자들이 인민군에 체포돼 목숨을 잃었는가 하면 외방선교회 소속 서양 신부님들은 이른바 '죽음의 행진'에 끌려갔다.

나 역시 소신학교 동기생 4명을 전쟁 통에 잃었다. 전남 출신의 신 학생 2명은 고향으로 피란을 내려가다 공산당에 부역을 했는지, 아니면 인민재판을 받았는지 돌에 맞아 죽었다는 얘기가 들려 왔다. 동족끼리 총을 쏘고 피를 흘리는 비극이었기에 더 슬프고 참담했다.

사실 난 로마유학을 가기 위해 6.25 전쟁 발발 3일전부터 여권수속을 밟고 있었다. 결국 유학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대신 5년 후배지만 대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정하권(현 마산교구 몬시뇰)과 최덕홍 대구교구장님 밑에서 부족한 신학공부를 했다. 아무리 후방이라지만 전쟁 통에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시시각각 전해지는 전황을 듣고 있노라면 '이러다 나라가 공산화되는 건 아닌가?'하는 걱정이 앞섰다. 이 나라가 공산당 손에 넘어가면 가톨릭교회는 박해를 받다 무너지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미 북한교회가 초토화되고, 많은 성직자들이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

그때 내 생각은 '이 전쟁에서 공산당이 이기면 그들 손에 죽느니 차라리 산에 들어가서 게릴라전을 벌이겠다'는 데까지 미쳤다. 국가체제보다 민족 동일성을 우선시하는 요즘 젊은이들은 그때 내가 품었던 생각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당시 공산당은 신부 한 명을 죽이는 것을 1개 사단을 섬멸하는 것처럼 여긴다는 얘기가 있었다. 공산혁명 과정에서 가톨릭, 특히 인민들(신자들)의 영적 세계를 관장하는 신부를 위험 천만한 반동세력이라고 간주한 것이다. 가톨릭을 막강한 군사조직으로 생각했던지 스탈린은 1945년 얄타회담 때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로마 교황은 도대체 몇 개 사단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는 얘기도 있다.

부산 피란시절의 고단한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영도에 서울교구 소속 신부와 신 학생들을 위한 임시거처가 마련되었다. 신부와 수녀들은 혼란 속에서 미국이 보내 준 밀가루와 의류 품을 갖고 구호사업을 벌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몇몇 신부들은 포로수용소에 출입하기도 했다.

나도 어느 신부님 일을 잠깐 거드는 동안 범일 동에서 부산역 방면으로 나갈 일이 자주 있었는데 차편을 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럴 때면 수녀님들을 이용(?)했다.

수도 복을 입은 수녀들이 부산 시내를 활주하는 미군 차량에게 태워 달라고 손짓을 하면 백발백중이었다. 로만 칼라를 한 신부들이 태워 달라고 하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미군들이 수녀들 에게만큼은 최대한 친절을 베풀었다. 그래서 급할 때는 수녀들을 앞세워 차를 세워 놓고 우리가 슬쩍 뛰어오르곤 했다.

대구교구 청 주교관에서 최 덕홍 주교님 지도를 받으면서 공부하던 어느 날, 주교님께서 나와 정 하권을 불렀다.

"자네들도 이제 사제 품을 받을 준비를 하게. 언제 사제 품을 받으면 좋을지 자네들이 상의해서 날짜를 잡아 보게나."


[평화신문, 제736호(2003년 8월 10일),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 열 네번째 이야기 ------


고통의 성모마리아 기념일'에 사제 품 받아

1951년 9월15일. 함께 공부하던 정하권(현 마산교구 몬시뇰)과 사제수품 일을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인 이 날로 잡았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잉태해 낳으시고 수난과 부활을 지켜본 성모 마리아야말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 걸은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모님처럼 고통 속에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묵묵히 따르는 것이 사제의 길이 아니겠는가.

사제생활의 모토로 삼고 싶은 성구(聖句)를 골라 쪽 상본에 새겨 넣어야 했는데 난 고심 끝에 시편 139장에 있는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디로 가리까?"란 구절을 선택하고 싶었다.

하늘 저 높이 올라가도, 땅 밑에 내려가도 거기에 계시는 하느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도 당신 오른손으로 나를 붙들어 주시는 분. 내가 그런 하느님을 떠나 어디로 도망칠 것이며, 설사 도망친다 한들 한순간이라도 편히 숨을 쉴 수 있겠는가. 시인이신 최민순 신부님(1975년 선종)이 마침 대구에 내려 오셨기에 내 생각을 말씀 드렸더니 "한편의 아름다운 시 같다"며 좋아하셨다.

그러나 홀로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과연 한 평생을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내가 오히려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성찰하고 고백해야 할 것은 '하느님 저는 죄인이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외에 무엇이 또 있겠는가. 결국 시편 51장에서 찾아낸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구절을 상본에 써넣었다.

52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지금도 그 같은 마음가짐에는 변함이 없다. 요즘 선후배 사제들의 임종을 지켜보거나 부고(訃告)를 접할 때마다 '나도 이제 머지않아 하느님 앞에 서겠지'라고 되새긴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내가 하느님께 가면서 바칠 수 있는 기도는 "주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지극하신 사랑으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것 외에 떠오르는 게 없다.

사제서품식이 열린 날은 마침 음력 8월 보름이었다. 대구 계산동성당 마당에서 올려다 본 가을 하늘은 유달리 맑고 높았다. 쪽빛 창공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사제 품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대구교구 신부님들과 교우들이 서품식장을 가득 메웠다. 서품식 중간쯤 이르러 성인호칭기도가 울려 퍼졌다. 제단 앞 바닥에 엎드려서 하느님께 이렇게 속삭였다.

"주님, 사실 저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다른 길은 보여 주지 않으시고 오로지 이 길만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13살 나이에 어머니한테 등 떠밀려 소신학교에 들어가 30살에 사제가 되었다. 18년 동안 하느님의 부르심에 회의를 여러 번 느꼈고, 신학교를 떠나고 싶은 마음에 꾀병을 내어 한학기 건너뛰기도 했다. 때로는 갈등과 유혹에 심하게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조금도 변함없이 나를 한 길로 이끄셨다. 그 큰 섭리와 은혜에 엎드려 감사 드린다.

특히 어머니의 기도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날 막내아들이 신부가 된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에서 기도와 눈물로 얼룩진 인고(忍苦)의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때는 사제수가 워낙 적었기 때문에 곧바로 안동본당(현 목성동 주교좌 본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았다. 그런데 막상 성당에 도착해보니 밥 끓여 먹을 솥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한 달 전에 떠난 전임 신부님이 빗 자루 하나 남겨 놓지 않고 비품을 모두 가져가신 것이었다.

임시방편으로 며칠 동안 여관에 묵으면서 신자들이 해다 주는 밥을 얻어 먹었다. 그리고 나서 인근 고아원에 부탁해 2달 가량 밥을 대 먹었지만 그 쪽에서도 힘이 드는지 하루 빨리 딴살림을 차리라는 눈치를 줬다. 하는 수 없이 성당 회장님께 얘기했더니 그 분이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숫가락, 젓가락, 밥그릇 등을 구해다 주었다. 돈을 주고 장만한 살림살이는 냄비 한 개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철칙처럼 내려 주신 '제1계명'을 첫 임지에서부터 거스르는 일이 발생했다. 신학생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첫째 계명은 "젊은 여자를 식모(요즘의 식복사)로 두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회장님이 구해온 식모가 하필이면 젊은 여성이었다. 나는 어머니 핑계를 대가면서 자초지종을 말씀 드렸더니 회장님은 "그럼 이 사람 밖에 없는 걸 어떡하죠? 어머니 뜻이 그러하시더라도 저를 믿고 쓰십시오."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돌이켜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 그 때는 왜 그토록 곤혹스럽던지….

첫 임지에서 주민들의 가난에 관심이 쏠렸다. 갓 태어난 신부이다 보니 하느님과 교회, 그리고 신자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열정이 더 뜨거웠는지 모르겠다. 당시 안동은 전화(戰禍)로 인해 성한 집보다 불타 버린 집이 더 많았고, 설상가상으로 두해 연속 흉년이 들어 주민들은 그야말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고 있었다. 읍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나무 껍질을 벗겨서 가루를 내어 죽을 끓여 먹고 사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교구에서 사제생활비를 주어 수중에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일한 수입원이라고 해 봐야 미사예물인데 그것도 한국 신자들이 바치는 것이 아니고 서양교회 신자들이 미사예물 지향으로 미사 한대당 1달러씩 보내 주는 것을 받는 것이었다. 초근목피로 목숨을 부지하는 주민들을 그 돈으로 돕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예수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까?'

며칠을 궁리한 끝에 묘안이 떠올랐다.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주민들의 딱한 사정을 적은 영문편지를 들고 부산에 계신 안 제오르지오 주교님(메리놀외방전교회)을 찾아갔다. 미국 주교회의 구호사업 한국지부장으로 와 계신 그분께 도움을 청하면 하다못해 밀가루라도 얻어 갖고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말로 '대박'이 그 곳에서 터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평화신문, 제737호(2003년 8월 24일), 정리=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 열 다섯번째 이야기 -----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15

        『 꿈처럼 아름다웠던 본당신부 시절 』

      성직생활 52년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순박한 교우들과 희노애락을 나눈 본당신부 시절이다.
      사진은 첫 부임지인 안동본당
      (현 목성동주교좌본당)의 여성 교우들.




      "신부님 출장가지 마세요. 성당이 텅 빈 것 같아요"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는 안동 주민들에게 도움을 줄 방도를 찾기 위해 부산에 갔다가 '대박'을 맞은 사연은 이렇다.

      주민들의 딱한 사정을 적은 영문편지를 들고 안 제오르지오(미국 주교회의 구호사업 한국지부장) 주교님을 찾아뵈었다. 하지만 안 주교님은 일본 출장 중이어서 사무실에 계시지 않았다. 대신 일본에 머물면서 한국 교황사절을 겸하고 계신 필스텐벨그 대주교님이 그 곳에 와 계셨다.

      필스텐벨그 대주교님께 찾아온 목적을 말씀 드렸더니 내 편지를 갖고 윗 층으로 올라가셨다. 한참 후에 내려오신 대주교님은 뜬 금없이 "내일 안 주교님이 일본에서 돌아오니까 그분을 꼭 만나고 가게"라고 말씀하셨다. 나를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분 말씀대로 다음날 안 주교님을 찾아뵈었다. 안 주교님은 나를 보고 반가워하시면서 수표를 한장 끊여 주었는데 그걸 보는 순간 뒤로 넘어질 뻔했다. 눈을 비비고 수표에 적힌 '0'자를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2'자 뒤에 '0'이 무려 7개나 달려 있었다. 2000만 원. 난생 처음 구경하는 거액이었다. 안 주교님은 대구에 계신 최덕홍 주교님께 전해주라면서 편지도 한통 건넸다.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 수표를 안주머니에 넣고 대구행 기차를 탔다. 누가 그 수표를 훔쳐 갈까 봐 무서워 기차가 터널에 진입하면 양 손으로 안주머니를 꼬 옥 감쌌다.

      대구교구장이신 최 주교님께 수표와 편지를 모두 드렸다. 마음 속으로 '내게 300만 원만 떼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다.

      "김 신부, 얼마쯤 받아 가고 싶은가?" "제가 그걸 어떻게 말씀 드리겠습니까. 주교님이 주시는 대로 받아 가겠습니다." "절반이면 되겠지" "(절반이면 1000만 원? 그렇게 많이….) 아이고, 감사합니다. 주교님 감사합니다."

      그 돈을 갖고 본당으로 돌아와 성당보수 작업을 시작했다. 주민들에게 돈을 무작정 나눠 주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일을 시키고 품삯을 후하게 쳐주었다.

      그리고 궁핍하기 이를 데 없는 공소 신자들에게는 아주 은밀한 방법(?)으로 돈을 나눠 주었다. 신자들 중에 가장(家長)이 고해성사를 보러 고해실에 들어오면 교적을 대조해 가면서 집안 형편, 생업수단, 농사 평수 등을 꼬치꼬치 캐물은 후 형편에 따라 현금을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여긴 비밀이 지켜져야 하는 고해 방입니다. 여기서 돈 받은 얘기를 밖에 나가서 하면 절대 안됩니다" 하고 엄하게 못을 박았다. 누구는 더 받고, 누구는 덜 받은 게 알려지면 뒷말이 나올 것 같아서 그랬는데 다행히 잡음이 일체 없었다. 아마 그때 고해실에서 돈을 받은 신자들은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중세시대 루터는 교회가 면죄부라는 걸 이용해서 돈을 받아 챙겼다고 주장했는데 난 거꾸로 고해실에서 돈을 나눠 주었다.

      첫 부임지라서 더 그랬는지 몰라도 안동본당(현 목성동주교좌본당) 사목생활은 정말 꿈처럼 달콤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매일 저녁에 교리 반을 열었다. 예비신자는 물론 교리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신자들이 많이 참석했다. 시골은 해가 지고 나면 마땅히 할 게 없는 터라 교리 반은 사랑방 역할도 했다. 교리수업이 끝나면 남성 교우들과 둘러앉아 안동소주를 몇 순배 돌리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만큼은 언제 찾아와서 요청을 해도 흔쾌히 응했다. 그렇게 해야 '착한 목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자들이 워낙 순박하고 정겹다 보니 금방 정이 들었다. 볼 일이 있어 대구에 가도 신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한시라도 빨리 안동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실제로 내가 대구에서 사나흘 볼 일을 보고 돌아가면 신자들이 성당 종탑 아래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안동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마지막 고개를 넘으면 나를 기다리는 신자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신자들도 뽀얀 흙먼지를 날리면서 달려오는 버스가 보이면 정류장까지 마중을 나왔다.

      그 무렵 신자들이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신부님, 대구 가지 마세요. 신부님이 하루라도 안 계시면 성당이 텅 빈 것 같아 우리가 너무 적적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신자들과 한 가족이 됐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자들에게 특별히 잘한 것은 없다. 평소 신념대로 열과 성을 다했을 뿐이다.

      안동 근처 예천본당에 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했던 신부가 사목을 했는데 그분은 나보다 전교를 잘해 신자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특히 우체국장, 경찰서장, 군수 같은 지역유지들을 척척 입교시켰다. 나도 그분 못 지 않게 열심히 전교했는데, 그리고 그분은 나보다 학교성적과 언변이 떨어지는데도 결과는 다르게 나왔다. 복음전교는 언변이나 지식보다 카리스마가 필요하고,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셔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도 그 때 깨달았다.

      사랑도 풋풋한 첫사랑이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사람들이 "성직생활 52년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냐"고 물어오면 난 서슴없이 "가난한 신자들과 울고 웃었던 본당신부 시절"이라고 대답한다. 일선 본당신부 생활이라고 해 봐야 안동본당과 김천본당을 합해 2년 반 밖에 안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때 추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요즘도 그 시절에 사귄 신자들을 만나면 그렇게 반갑고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고백하건대, 난 주교로 살아가면서도 본당신부 생활을 무척 그리워했다. 혼자서 '이런 것(주교직무와 복장) 다 내려놓고 본당 신부로 가는 방법은 없을까?'라는 궁리도 해 보았다. 사제 인사 철이 되면 시골본당으로 발령 난 신부들 중에는 가기가 싫어서 억지로 끌려가는 듯한 신부를 간혹 보게 되는데 그럴 때면 '자네가 가기 싫다면 내가 가서 본당신부 생활하고 싶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했다.

      안동본당 시절의 추억을 더듬다 보니 "젊은 여자를 식모(식복사)로 두지 말라"는 어머니의 '제1계명'을 어긴 것이 들통났던 게 생각난다. 어머니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젊은 여자를 식모로 뒀는데 어머니께서 성탄절을 앞두고 불쑥 성당에 나타나신 것이다.<계 속>

      [평화신문, 제736호(2003년 8월 10일),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 갈멜 수도회 수도자들의 삶을 노래한/故 최민순 신부님의 아름다운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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