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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연재: 11, 12)

작성자  |출발천사 작성일  |2009.03.21 조회수  |1438

---- 열한번째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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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한 여인에게서 '청혼'받고 고민

나 같은 사람은 누구와 언성을 높여 싸워 본 일이 한번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전쟁터에서 돌아와 어머님을 찾아 뵙기 위해 도착한 대구에서 경찰관과 대판 언쟁을 벌인 적이 있다.

부산항에서부터 조국의 혼란스런 현실에 실망해 마음이 언짢았던 것이 사실이다. 형님 자전거를 타고 부산항으로 짐을 찾으러 갈 때도 경찰관의 고압적 검문 태도에 마음이 상했다. 대구행 열차는 유리창이 모두 떨어져 나간 데다 시트도 성한 것이 없었다. 해방 후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사람들이 떼어 간 것이다.

전등도 없는 열차가 컴컴한 터널에 들어가면 선반 위에 올려 둔 짐이 없어지는 일이 다반사라 나 역시 터널에서는 가방을 꼭 껴안고 있어야 했다.

'이 나라가 제 꼴을 갖추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내내 마음이 답답하고 서글펐다.

경찰관과 언쟁이 붙은 이유는 통행금지 위반 때문이었다. 밤 늦게 역에 도착하는 승객에게는 손에 도장을 찍어 주는 모양이었는데 일본에서 돌아온 내가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사시는 남산 동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데 경찰관이 나를 불러 세웠다.

"여보 여보, 어딜 가요?" "어딜 가다니요. 집에 가는데요." "이 사람이, 통행금지 있는 거 몰라?" "… 통행금지요? 처음 듣는데요." "(거칠게) 모르다니? 어디서 왔어?" "며칠 전에 일본에서 왔습니다. 일본서 공부하다 귀국하는 길입니다." "공부만 하면 제일이야." "몇 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으면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럼 경찰관이 친절하게 가르쳐 줘야지, 다짜고짜 죄인 다루듯 다그치는 게 잘하는 겁니까."

나는 물러서지 않고 언성을 높여 꼬박꼬박 말을 되받아 쳤다. 일제 압제에서 풀려 났으면 국민들이 서로 감싸 주면서 한마음이 되어야 할 텐데 경찰관의 태도에서 보듯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난 그 경찰관이 미운 게 아니라 조국의 현실이 서글펐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도착했다. 그 동안 내가 어머니 품에 안겼지만 그 때는 내가 어머니를 가슴에 안았다. 어머니가 그렇게 우시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다음날부터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네는 어머니 덕에 살아왔네"라는 인사말을 했다. 그렇다. 난 어머니 기도 덕에 목숨을 건졌다. 어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구교구청 옆 성모 당에 나가 이 아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바다 한가운데서 미군 잠수함 공격에 목숨을 잃을 뻔한 그 순간에도 어머니는 성모님께 아들의 무사귀환을 빌고 계셨다.

어머니의 그런 사랑을 느낄 때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얼마나 더 크겠는가'하고 생각하곤 했다.

신학교에 복학하기 전까지 대구에서 9개월쯤 머물렀다. 대구대목 구 임시 교구장인 주재용 신부님의 일을 거들고, 형님이 계신 부산을 오가면서 보낸 그 기간에 갈등과 유혹이 끊이지 않았다.

누님은 집안 형편이 쪼들리자 "네 형이 신부됐는데 너까지 또 신부가 돼야겠느냐"면서 신학교 복학을 탐탁스러워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보다 마음을 더 심란하게 만든 사건은 한 여인의 청혼이었다.

그 여인은 형님이 계시는 범일성당에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형님이 관여하는 고아원에서 일하면서 가끔 사제관 청소를 해주었는데 잘은 몰라도 심적 고통이 큰 사람처럼 보였다. 마음의 병 때문인지 그녀가 병으로 눕자 형님은 "다른 사람은 그 여자를 좀 어려워 하니 네가 병간호를 해주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대답하고 병간호를 하는데 그녀가 어떤 얘기를 하다 말고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장황하게 들려주었다.

그 때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고해성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당 신부님은 그녀가 어려워할 것 같아 영도에 계시는 프랑스 신부님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씀 드리고 모셔 왔다. 그녀의 고해성사는 한시간도 넘게 걸렸다. 그런 관심과 배려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 잡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마음이 극도로 지친 상태에서 자신에게 잘해주는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그 쪽으로 마음이 쏠리는 것은 당연할 것도 같다.

어느 날 그녀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를 받아 줄 수 있겠어요?"

깜짝 놀랐다.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소신학교 시절에 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갈 때면 교장 신부님이 "여자는 아예 쳐다보지도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셔서 안면이 있는 여자에게도 고개를 돌렸는데 프로포즈까지 받게 될 줄이야….

물론 어릴 때부터 '나만을 사랑해주는 여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막상 그런 여인이 나타나자 나에게 모든 걸 거는 한 사람을 평생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신부가 돼서 부족하나마 여러 사람에게 고루 사랑을 쏟는 일이 훨씬 쉬울 것 같았다.

내가 단호하게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단념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훗날 전해 들었을 때는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 해프닝이 나는 사제의 길을 가야 할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하는 나를 붙잡아 준 은인은 장병화 주교님(1990년 선종)이다.

당시 우리 본당에 계시던 장 신부님께 내 결점만 쏙쏙 골라서 과장되게 말씀 드린 적이 있다. 신부가 되어도 집안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고, 여자에게도 마음을 쉽게 빼앗길 것 같다는 식으로 말이다. 사제가 되면 안 될 사람이라고 판단하시도록 유도한 것이다.

장 신부님은 한 달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시더니 한 달 내내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정확히 한 달째 되는 날 아침미사에 참례한 나를 부르셨다.

"신부는 모름지기 자신의 약점이 뭔 지 알아야 해. 그래야 그걸 이겨내고 성덕을 쌓을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자네는 꼭 신부가 돼야 하네."

장 신부님은 내가 한 말을 모두 거꾸로 해석하시고 신학교 복학을 독려하셨다.


[평화신문, 제734호(2003년 7월 27일),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 12 번째 이야기 ---------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12
        『 '삭발 례' 감동 사제수품 때보다 커 』



<사진설명> 1950년 4월 대신학교 교정에 모인 김수환 추기경의 소신학교 동창들. 앞줄 왼쪽부터 신종호 신부·김정진 신부·최석우 신부, 뒷줄 왼쪽부터 김 추기경, 한 사람 건너 김재덕 신부·최석호 신부·김영일 신부·최익철 신부·지학순 신부. 젊은 신부들이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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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베르 교수신부님 금경축 날 전쟁 터져


1947년 9월 서울 혜화동 신학교 교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일본 유학 기간의 공백 때문에 후배들과 함께 공부해야 했다. 내가 소신학교 5학년 때 1학년에 갓 입학한 후배들이었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비슷한 또래도 더러 섞여 있었다.

내 소신학교 입학 동기들은 그 해에 벌써 사제 품을 받았다. 동기라 하더라도 신부와 신학생 신분은 천양지차(天壤之差)라 착잡한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다.

남들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했다. 유학과 학병시절에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새 친구들이 모여들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그 때는 지금보다 남들에게 얘기를 쉽게 꺼내는 편이었던 것 같다. 10개비가 든 담배 한 갑을 다 피워 가면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다.

담배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난 우리 민족이 해방되는 바로 그 날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담배를 배워 보려고 했지만 몇 모금 빨고 나면 머리가 아파 그만두곤 했다. 그런데 전쟁터에 나가 있는 학도병에게 들려 온 해방 소식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그 날 입에 문 담배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명동성당이 조용한 날이 없던 1970년대는 하루에 두갑까지 피웠는데 1984년 교황님이 한국에 다녀가신 그 해 가을에 완전히 끊었다. 요즘 금연열풍이 불어 담배를 끊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인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100% 확실한 금연비결(?)을 공개하겠다.

심지어 손을 물어 뜯으면서 분심을 쫓는 친구도 있었다. 평양 출신의 서운석 신부는 성체조배 하는 모습이 얼마나 경건했던지 마음 속으로 '기도를 가장 잘 하는 신학생'이라고 인정해 주었다. 서 신부와 충남 공세리 출신의 강만수 신부 등 몇 명은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신학생들이 성서 다음으로 애독한 것이 '준주성범'(遵主聖範, Imitation of Christ)이라는 영신지도서였다. 제목 그대로 주님을 따르는 데 필요한 거룩한 모범을 제시한 그 책을 옆에 끼고 살면서 그 가르침대로 살려고 애를 썼다.

신학교 생활 중 삭발례(削髮禮)의 감동은 잊을 수가 없다. 삭발례 란 세속을 끊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의미로 머리를 깎고 수단을 착용하는 예식인데 성직 입문의 첫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사라진 예식이다. 스님이 되기 위해 머리를 깎듯이 성직자가 되기 위해 첫 관문을 통과한 것뿐인데 그 날의 기쁨은 사제수품 때보다 오히려 더 컸던 것 같다.

하느님이 그 동안 내게 주신 영적 기쁨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그 날 예식의 복음이 가슴 깊이 와 닿았다. 말씀 줄거리는 "야훼 하느님은 나의 유산이다"라는 것이었다. 내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재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있다 해도 하느님이 계시는 한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내가 차지할 수 있는 몫처럼 느껴졌다.

교정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신학생들의 순수한 열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신학교 울타리 밖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정치인과 국민들이 좌우로 갈리어 극한 이념대결을 벌이고, 곳곳에서 폭력적 투쟁을 일삼았다.

많은 지식인들이 좌익계열 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 일본 상지대학 선배들 중에도 적지 않은 수가 좌익단체에서 비중있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함경도 출신의 유학 동기를 서울역 앞에서 만난 일이 있는데 그 친구도 좌익에 가담한 듯했다. 그 혼란스런 이념대결을 지켜보는 동안 내가 가톨릭 신자가 아니고, 신학생이 아니었더라면 좌익 쪽으로 기울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우익 성향을 보이기는 했으나 기본 입장은 중립이었고, 우리 신학생들 역시 그러했다. 일반 대학교수로 있던 한 선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 학생들이 교수님 입장은 뭐고, 가톨릭 입장은 뭡니까 하고 자주 물어봐.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좌익과 우익 중간에 하느님당(黨)이 있는데 난 그 당원이다. 하느님 당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기우는 게 아니라 하늘로 곧장 올라간다'고 대답하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답(名答)이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내가 만일 하느님당 당원이 아니었더라면 이념투쟁의 한복판에서 방황했을지도 모른다.

1950년 6월25일은 신학교 교수인 공 베르(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의 사제수품 50주년 금 경축 날이었다. 내가 총급장(총학생회장)인데다 공 신부님은 소신학생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 온 터라 학생들을 동원해서 금 경축 행사를 정성껏 준비했다.

그 날 금 경축 행사를 다 치를 때까지도 전쟁이 일어난 줄 몰랐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의정부 방면에서 피난민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청량리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느니, 미아리 고개까지 들이닥쳤느니 하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조국 광복 5년 만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다니, 그리고 우리 국군이 그토록 힘없이 밀리다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국군들이 신학교 뒷 편 언덕 배기 성터에 포를 설치하는 것을 보고는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데도 신학생들은 27일 저녁까지도 학교에 남아 있었다. 식당에 저녁밥을 준비해 놓았지만 주위가 뒤숭숭해서 어느 누구도 밥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교수신부님 같은 웃어른으로부터 어떻게 행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지도 않았다. 사태 추이를 종잡을 수 없는 건 신부님이나 신학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날 저녁부터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단 명동성당으로 가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총급장인 내가 학생들을 통솔해야 했으나 나 역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평화신문, 제735호(2003년 8월 3일),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 등대

    늘 애써서 올려주시는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고운모습 고운마음, 그대로 전해져옵니다.
    멋진 주말저녁 되십시오.

    2009-03-21 20:00:28 삭제
  • 출발천사

    등대님도 그 환한 미소로 행복 바이러스를 많이 퍼뜨려 주세요...항상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황사에 기온의 변화에 건강 유의하시구요...^^*

    2009-03-21 21:00:46 삭제
  • nittany

    사진을 보니 오랜전 사진이지만 다들 너무 미남이시고...잘 못 먹을 때이지만 ....... 신부님들 눈빛이 지금도 문창호지 30장은 뚫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저는 김수환 추기경님 미남이라 생각해본적 없었는데.. 이 사진을 보니 젊은 나이지만 예리함과 아울러 후덕하심이 참 조화를 잘 이루시네요... 다시 보고 싶습니다. 스테파노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2009-03-22 07:00:50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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