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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삶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연재: 8, 9, 10)

작성자  |출발천사 작성일  |2009.03.20 조회수  |1946


........................†....................


내 영명축일에 태평양의 작은 섬으로



1944년 결국 학병으로 입대해 일본 중부 나가노 부근 마쯔모도라는 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고된 훈련이 연일 계속됐다. 얼마나 잠이 부족하고 배가 고팠던지 그 때 소원은 딱 두 가지였다. 배가 부르도록 실컷 먹고, 허리가 뻐근할 때까지 드러누워 실컷 자는 것. 요즘은 밤마다 잠이 안 와서 고생을 하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잠이 쏟아지던지….

훈련소에서도 입 바른 소리 잘하는 성격이 불거졌다. 어느 날 나이 많은 고참상사가 나와 친구를 부르더니 허심탄회 한 대화를 제의했다. 그는 우리가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그 자리에서 고지식하게도 한국인에 대한 차별의 부당성 같은 얘기를 해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 때까지만 해도 훈련병들 가운데 훈련점수가 2위였는데 그 날 이후로 꼴찌에서 2번째로 급락했다. 그 바람에 사관후보생 자격시험을 치를 기회도 박탈당했다.

훈련을 마치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 커튼을 모두 내렸기 때문에 남으로 가는 건지, 아니면 북으로 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전선(戰線)으로 간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기차가 멈췄다. 유학생활을 하던 동경과 그리 멀지 않은 요코하마였다. 그 곳에서 일주일 가량 대기하는 동안 온갖 흉흉한 얘기가 다 들려 왔다. 요코하마 대기 병력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는데 십중팔구는 도중에 미군 잠수함 공격을 받아 물고기 밥이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요코하마 대기소는 사찰이었는데 그 곳에서 성탄절을 맞이했다. 전선으로 떠날 날을 기다리면서 성탄 밤을 지내는 신학생의 신세가 갑자기 서글퍼졌다.

그 때 목사수업을 받다 입대한 친구가 "거룩한 성탄 밤인데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조용한 곳으로 가서 함께 기도하자"고 제의했다. 기쁜 마음으로 따라 나서 조용한 곳을 찾아보았더니 불상 뒤가 제격이었다.

그 자리에 사람들이 버린 잡동사니가 좀 있었는데 일본 가요집이 눈에 띄었다. 가요집에 성탄캐럴 송 '고요한 밤'도 있었다. 우린 이래저래 잘됐다 싶어 기도하고 나서 가요집을 펴 들고 '고요한 밤' 노래를 정말 거룩하게 불렀다.

요즘 일치주간이 돌아오면 천주교, 개신교 등의 그리스도교인들이 한데 모여 일치기도회를 여는데 우린 벌써 그 때 일치기도회(?)를 연 셈이다. 그것도 옆에 부처님까지 모셔 놓고 말이다.

이튿날 2000톤급 화물선에 올라 태평양으로 나갔다. 그 날이 마침 내 영명축일(스테파노)이라 괜 시리 마음이 울적했다. 파견 지는 남쪽의 작은 섬 부도라는 곳이었다. 직선 거리로 3일이면 갈 것을 미군 잠수함을 피해 지그재그로 가야 하기 때문에 꼬박 6일이 걸린다고 했다. 배 멀미가 하도 심해서 아무 것도 먹고 마시지 못했다. 배에는 연료 드럼통과 탄약이 잔뜩 실려 있었다. 그 위에 가마니를 깔고 축 늘어져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항해가 거의 끝 나갈 무렵이었다. 친구가 헐레벌떡 뛰어 내려오더니 비상 구명대를 챙겨 빨리 갑판으로 올라가라고 소리쳤다. 미군 잠수함이 출몰(出沒)하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갑판 위에서 사색이 되어 검푸른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연료와 폭발물을 산더미처럼 실은 배가 어뢰 공격을 받으면 배는 물론이고 사람도 산산조각이 날 판이었다.

겁에 질려서 어느 누구도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 폭풍 전야의 고요가 느껴졌다. 물결이 찰랑찰랑 흔들리는 수면 저 아래에서는 이미 어뢰가 배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태평양 망망대해에서 맞닥뜨린 절제절명의 위기.

그 순간 어머니의 모습이 수평선 위로 또렷하게 떠올랐다. 불현듯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어머니의 무릎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참 이상한 체험이었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만일 내가 죽게 되더라도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는 절대 죽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어미의 심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마지막 순간에 눈에 밟힌다면 자식의 고통 또한 얼마나 클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죽음이 닥치자 정반대로 어머니의 품이 그리워졌다.

나는 그 때 스스로 만들어 낸 생각과 본심(本心)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그 이후로 내 생각이 앞설 때면 나의 본심, 즉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참 모습이 무엇인가를 성찰해보게 되었다.

천만다행으로 잠수함은 우리 배를 공격하지 않았다. 죽음을 모면한 것이 기쁘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큰 하느님 사랑에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또 그 경험이 없었더라면 어머니에 대한 정이 이토록 애틋하게 마음 속에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때는 어머니의 사랑이 부담스러워 일부러 거리를 둔 적도 있었는데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내 인생의 큰 소득이다.

우리가 주둔한 섬에서는 다행히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유황 도를 미군이 점령하고 난 후에는 매일 오전 일정한 시각에 미군의 폭격이 있었다. B-29 폭격기가 일본 본토를 폭격하고 돌아오다 남은 포탄을 소진하느라 떨어뜨리는 폭격이었기 때문에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침내 나와 동료 학병 몇 명은 유황도로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은밀히 계획을 세웠다.

카누처럼 생긴 조그만 배 한 척을 어렵사리 구했다. 그리고 수류탄, 비상식량 건빵, 흰 천을 감춰 두었다. 흰 천은 바다 한가운데서 미군 비행기나 군함을 만나면 항복의 표시로 흔들려고 준비했다. 탈출 직전까지 우리를 망설이게 한 것은 유황 도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D-day,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았다.

탈출의 날이 밝았다. 아침에 미군 B-29 폭격기가 포탄을 쏟아 붓고 돌아가면 곧바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작정이었다. 우리 일행은 몸을 숨기고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각에 나타나는 폭격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날 따라 해가 중천에 걸릴 때까지 폭격기가 보이질 않았다. 폭격기가 돌아간 후에 출발해야지 만일 바다 한가운데서 폭격기를 만나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기다리면 기다릴 수록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냥 부대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태평양 한가운데서 죽을 각오를 하고 출발하느냐의 선택만 남았다. 우린 출발하기로 결정하고 배를 띄웠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미군 폭격기가 그제 서야 나타났다. 파도가 심해 한 사람은 멀미를 하느라 정신을 못 차렸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배를 돌려 부랴부랴 섬으로 되돌아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도주계획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우리의 목적지 유황도는 200마일(약 320㎞)이나 떨어져 있었다. 카누처럼 생긴 배를 타고 도주하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였다.

그리고 그 날 부대에 조금만 더 늦게 복귀했더라면 총살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일본(군)을 비난하는 편지를 내 사물함에 꽂아 두고 출발했으니 말이다. 한창 혈기왕성 한 나이라서 겁없이 도주를 감행했지 나이가 조금 더 들었더라면 그런 무모한 계획을 행동에 옮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럭저럭 부대생활을 했다. 남의 나라 전쟁터에 끌려 나온 학병 신분이었기에 별다른 의미를 둘 수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히로히토 일본 천황이 연합군에 무릎을 꿇었다. 일본의 항복은 우리 민족의 해방이었다.

'아, 고국에선 36년 압제의 사슬에서 풀려 난 백성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외치고 있겠지….' 일본 군복을 입고 있는 조선 학병의 기쁨과 감격은 더 컸다.

미군은 몇 달 동안 우리를 완전히 무장 해제시킨 후 섬에 상륙했다. 일본군측에서는 부대원들이 미군과 접촉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시켰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미군은 일본 군인들을 본토로 송환하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억울하게 끌려 온 한국인들을 먼저 풀어 줘야 하는데 미군은 무슨 영문인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여기에 강제로 끌려온 한국인들이 있으니 빨리 돌려보내 달라"는 내용의 영문편지를 쓰고 맨 밑에 '스티븐 김'이라고 싸인을 했다. 내 세례명을 영어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편지는 내가 갖고 있던 콘사이스 영어사전과 동료의 중학교 1학년용 영어교과서, 그리고 우연히 손에 쥔 'LIFE'라는 영문 화보잡지를 총동원해서 쓴 것이다. 문제는 미군과의 접촉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어떻게 편지를 전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미군 주둔지역 정지(整地)작업에 불려 나가 일하던 중 트랙터를 몰고 있는 미군 병사에게 살짝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난생 처음 영어로 말을 하는 데다 절박하게 부탁하는 입장이라 내 딴에는 깍듯이 예의를 갖췄다.

"Would you pease be kind enough to speak with me?" "What?" "… …" "What?"

미군 병사가 그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접촉을 포기하고 땅에 주저앉아 묘안을 짜냈지만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후 그 병사가 다가오더니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느냐"는 식으로 말을 걸어왔다. 너무나 반가웠다.

난 땅바닥에 한반도와 일본 지도를 그려 가면서 "여기는 일본, 저기는 한국. 난 한국 사람이다. '히로이드'(미국식 일본 천황 이름)를 증오(hate)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너희 사령관에게 전해 달라"면서 병사 손에 몰래 쥐어 주었다. 며칠 후 미군측에서 요란스럽게 편지의 주인공을 찾아다녔다. 한국인이 열 댓명 있었으니까 나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미군 사령관은 나를 불러놓고는 "내가 사령관이다. 질서문란 행위는 용납하지 않는다"면서 엄포만 놓았다. 실망하고 나오는데 사령관 부관인 중위가 나를 따로 불렀다. 의사소통이 안돼 몸짓과 필담(筆談)으로 1시간 가까이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왜 나를 따로 불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중위는 "그 동안 이 섬에 미군 조종사 열댓 명이 공격을 받고 추락했다. 그들의 행방을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미군이 한국인을 풀어 주지 않는 이유를 그제 서야 알았다. 일본군들이 모두 모른다고 발뺌을 하자 한국인들에게 정보를 캐낼 요량으로 붙잡아 둔 것이었다.

그 얘기라면 나도 아는 것이 있었다. 체포된 미군 조종사들이 묶여 있는 것은 두 눈으로 직접 본 데다 그 이후 일본 군인들이 미군 인육(人肉)을 먹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건너편에 일본군이 있기 때문에 지금으로선 알아도 말할 수 없다"며 한국인에 대한 신변 안전보장을 요구했다. 그가 내 요구를 받아들여 그 섬의 한국인들은 모두 미군지역(American Zone)으로 들어왔다. 육군에는 학병들이 전부였으나 해군 쪽에서는 100명이 넘는 한국인 노무자들이 넘어왔다.

그 때 일본 해군 사령관이 노무자들에게 무슨 거짓말을 했던지 그들은 "학병 몇 명 때문에 이제 미군 종살이를 하게 됐다"며 우리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난 "미군의 손을 거쳐야 우리가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그들을 설득했다.

다행히 노무자들 중에서 목격자 3명이 나타났다. 그 무렵 괌(Guam)에서는 전범(戰犯)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미군측의 동행 요청을 받고 재판증인으로 나설 노무자 3명과 함께 괌으로 건너갔다.

[평화신문, 제731호(2003년 7월 6일),김원철 기자][편집 : 원 요아킴]



............. 아홉 째 이야기 ............

미군이 점령한 부도(父島)에서 재미난 사건도 있었다.

하루는 폭격으로 파인 땅을 고르는 노역을 마치고 막사로 돌아가는데 목사 친구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더니 “저 미군한테 말을 걸어 보자”고 했다.재울 옆 언덕바지에 몸을 반쯤 기대고 누워서 작업하는 우리를 감시하던 헌병이었다. 미군하고 손짓 발짓 섞어 가며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지만 영 자신이 없었다.

목사 친구는 “신학교에서 미국 선교사들을 자주 만났기 때문에 웬만큼 통할 것이다”며 그 헌병에게 넉살 좋게 말을 걸었다.

“What's your religion?”(네 종교가 뭐야?)” “I'm catholic(가톨릭이다)” '가톨릭'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나는 앞으로 뛰어나가 “Me too, Me too(나도 가톨릭이다)하며 반가워했다.”

그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You jab (너는 일본 사람이잖아)”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흔히 그들을 '왜놈'이라고 부르는 것과 어감이 비슷하다.그의 말은 너는 일본 사람인데 어떻게 가톨릭을 알고 있느냐는 뜻이었다.

그 때부터 또 땅바닥에 일본과 한국 지도를 그려 놓고 “난 이쪽에서 살던 한국 사람인데 학병으로 끌려 왔다. 일본사람이 절대 아니다. 난 한국 가톨릭 신학생이다.” 고 설명했다.

“Can you serve mass?(너 미사 복사를 설 줄 알아?” 형편없는 영어 실력으로 그 질문을 용하게 알아들었으니 참으로 신통 방통한 일이다.

“물론 할 수 있다고 대답했더니 그는 천주교 신자라는 증거를 대 보라는 듯이“어떻게 하는 건지 한 번 해 보라”고 주문했다.

“인 노미네 빠뜨리스 엣 필리이 엇 스피리뚜스 상띠 아멘.(In nomine patris et Spiritus Sancti.Amen.) 그에게 라틴말로 십자성호부터 그어 보였다. 그 때는 제2차 바티칸 공의 회 이전이라 전 세계 모든 교회가 라틴어 미사경문을 사용하던 시절이다.

이어 층하경(층下徑)을 바쳤다. 층하경은 미사 시작에 앞서 주례사제와 복사가 제단 아래서 주고받으며 바치는 기도였는데 복사를 하려면 제법 긴 층하경을 모두 외우고 있어야 했다.

“인 뜨로이보 앗 알따레 데이. (나 이제 천주의 제단 앞으로 나아 가리로다)” “앗 데움 귀 레띠피깟 유벳뚜뎀 메암.(나의 청춘을 즐겁게 하여 주시는 천주께 나아 가리로다.)” 그 헌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내친 김에 고개를 숙이고 가슴을 치며 고죄경(고백기도)을 바치기 시작했다. “메아 꿀빠(Mea Culpa. 제 탓이오)...” 그 순간 헌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나랑 똑같이 가슴을 치며“메아 꿀빠. 메아 꿀빠. 메아 막시마 꿀빠(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제 큰 탓이 옵니다.)”라고 기도했다. 그러더니 나를 와락 껴안고는 “너는 틀림없는 가톨릭이다”며 기뻐했다.우리 주위로 빙 둘러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일본군들은 '두 사람이 지금 뭐 이상 한 짓을 하는가?'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병이 반가운 마음에 속사포처럼 쏟아 내는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나도 복사를 했다. 한때 신부가 되려고 했다. 내 누이는 수녀다” 라는 말을 대충 이해했다.

가톨릭신자는 기차나 버스 안에서 옆 사람이 묵주반지를 끼고 있는 것만 봐도 특별한 동질감을 느낀다. “아,교우 시군요”라는 인사 한마디면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봄볕에 눈 녹듯 사라지는 게 신자들 정서다.

그런 정서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선발하신 사도들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법통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종교를 믿는다는 동질감이 아닐까 싶다.

이 세상에 수많은 종교와 종파가 있지만 가톨릭은 하나다.세상 어디를 가도 전례와 교리, 교회구조가 똑같다. 미국 뉴욕 번화가에 있건 아프리카 밀림에 있건 지구상의 모든 가톨릭교회는 하나의 믿음으로 베드로 사도 후계자인 교황과 연결돼 있다. 즉 모든 신자가 한 가족 한 형제다. 그러니 패전국의 학병. 그것도 일본군 군복을 입고 있는 한국 신학생이 그 섬에서 미국 형제를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가톨릭 신학생이란 신분이 알려진 덕에 그 해 성탄 대축일 미사에 참례하는 행운까지 얻었다. 성탄절 직전. 군종 목사는 수천 명 되는 일본군 중에 유일한 가톨릭 신자인 나를 불러 “유황도에 있는 군종 신부가 여기 와서 성탄전야 미사를 할 예정인데 원하면 참례해도 좋다”고 말했다. 부도에 군종 목사는 있었지만 군종 신부는 없었다. 미사참례라는 말에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막상 성탄전날 밤 미사가 봉헌되는 막사로 갔더니 미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아무래도 미사시간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벽면 십자가를 향해 서서(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방식)두 팔을 벌리고 전례를 거행하는 군종 신부님 뒷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체격이 건장한 미군들 틈에 끼어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로 봉헌하는 미사였지만 내 마음은 내내 감동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1년 넘게 미사참례를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영성체 시간이 되자 당혹스러웠다. 1년 넘게 고백성사를 보지 못해 성체를 받아 모시러 나가면 안 되는데 시선은 자꾸 신부님 손에 들린 성체를 향했다.

당시 성탄미사는 3대 연속 봉헌됐다.사제는 자정미사를 신자들과 성대하게 봉헌한 뒤 나머지 미사 2대는 신자들이 남아있건 집에 돌아가건 상관하지 않고 연속해서 드렸다. 미사가 끝나면 잠깐이라도 고해성사를 본 뒤 다음 미사에서 성체를 모시면 되겠지만 늦게 도착해서 몇 번째 미사인지 알 길이 없었다. 만일 마지막미사라면 1년 만에 성체를 모실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잃는다.

나는 한참 망설이다 용기를 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시니까 통회하는 마음으로 보시면 이해해 주실 거야’라고 자위하면서 성체를 받아 모셨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 미사가 아니었다. 미사가 끝나자 복사를 섰던 군인은 돌아가고 신부님 홀로 미사를 이어 드렸다. 나는 미사 순서와 복사 역할을 훤히 꿰뚫고 있는 터라 아무런 실수 없이 미사 집전을 도왔다.

미사가 끝나자 신부님은 제의도 벗지 않은 채 나를 껴안더니“자네는 누군가?” 하고 물었다.“한국에서 온 신학생”이라고 대답하자 “이렇게 감동적인 미사는 처음이다.”가톨릭은 인종,민족,언어,이념을 초월하는 종교다”며 감격스러워했다.

그 신부님은 얼마 뒤 괌으로 사목 지를 옮기셨다. 미군 전투기 조종사 실종사건 재판의 증인으로 나선 노무자들과 괌에 체류하고 있던 나는 그 곳에서 신부님과 반가운 상봉을 했다. 미사에 참례하면 신부님은 항상 내게 복사를 맡기셨다. 그 곳에서 6개월 정도 머물다 일본을 거쳐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밝았다.


FBI가 나를 추적한 사연

불가에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1977년 5월, 한인본당 사목방문과 노틀담대학교 명예 법학박사학위 수여식 참석을 겸해 미국에 갔을 때다. 학위 수여식 후 한인 공동첼를 방문하려고 시카고 공항에 내렸는데, 마중 나온 성콜롬반 외방선교 회 신부님이 “혹시 켈리 신부라는 분을 아세요?”하고 물었다.

퍼뜩 떠오르지가 않아 이리저리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신부님이 “해군 군종신부? 출신”이라는 힌트를 줬다.

해군 군종신부?…….아, 그 신부님! 부도랑 괌에서 미사할 때 내가 복사를 섰던 그 신부님. 맞아, 그분 성함이 켈리야. 그 때 소속이 시카고 교구라고 하셨어, 그런데 그 신부님을 아세요?”

“물론 알지요.우리 이웃 본당에서 사목하고 계시는데, 김 추기경님이 시카고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내일 점심식사에 초대하셨어요.”

다음날 설레는 마음으로 캘리 신부님을 만나러 가는데 골롬반회 신부님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거기 마면 무척 놀랄 일이 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게 뭐냐고 물어도 “가보면 안다”면서 좀체 알려 주지를 않았다.

캘리 신부님과 32년 만에 재회를 했다. 얼마나 반갑던지 사제관으로 들어갈 생각은 안하고 문 앞에 서서 악수와 포옹을 번갈아 가며 한동안 인사만 나눴다. 드 때 노틀담대학에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도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한 터라 학위 수여식 사진이 전국 주요일간지에 실렸다. 켈리 신부님이 신문에 난 내 얼굴을 보고 30여 년 전 부도에서 만난 한국 신학생이란 걸 용하게 알아챈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 신부님과 몇 마디 주고 받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신부님은 우리에게 방해가 될까 봐 나가서 복도에 있는 전화를 받았다.그 때 골롬반회 신부님이 “저 전화 받으세요, 저게 바로 오늘의 '빅서프라이즈'입니다.”라며 방에 있는 수화기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김 추기경입니다.” “반가워요. 딕이라는 사람인데 저를 기억하겠어요?” “딕? 글쎄요, 죄송하지만,잘 기억이 나질 않네요?” “부도에서 만난 해병대원, 딕을 모르겠어요?”

부도에서 해병대 대원들과 자주 마주치기는 했다. 몇 명 친해진 대원들과는 손짓 발짓 섞어 잡담을 주고받으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도 했다.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 사람 얼굴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는 “쌘프란시스코 FBI에서 일하고 있어요.보고 싶으니 당장 만납시다.”고 말했다.

FBI(미 연방 수사 국)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당시 내게는 공안 당국의 감시 눈길이 늘 따라붙었다.1971년 전국으로 생중계되는 명동대성당 성탄 자정미사 강론에서 박 정권의 장기집권 술수을 비판한 뒤로 요주의 인물이 됐기 때문이다. 내 일거수 일투족을 어떻게 한 뒤로 요주의 인물이 됐기 때문이다. 내 일거수 일투족을 훤히 꿰뚫고 있던지 외국 공항에 도착해도 현지에 상주하는 정부요원들이 어김없이 나와 있었다.

그런데 나보다 더 놀란 사람이 골롬반회 신부님이었다. 몇칠 전 한 남자가 신부님 숙소로 전화를 걸어“여긴 FBI인데, 한국에서 온 김수환 추기경 행방을 아는가?”하고 물었다는 것이다.잠결에 전화를 받은 신부님은 FBI에서 나를 찾는다기에 무슨 큰 일이 난 줄 알고는 “그럼 당신도 켈리 신부를 아는가? 마침 마침 김 추기경이 켈리 신부를 만날 예정인데. 그 때 3자 전화상봉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딕(Dick,리차드 애칭)을 잠깐 만났다. 그는 언행이 거칠기 짝이 없는 해병대 대원들 중에서 군계일학(群鷄一鶴)처럼 점잖은 친구였다. 나는 양반 중의 양반인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꽤 정이 들었는데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는 “당신은 쉽게 잊을 우 없는 친구”라며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유학 길에 오르기 전에 외삼촌과 찍은 내 사진이었다. 맙소사! 부도에서 헤어질 때 건네준 정표(情表)를 32년째 간직하고 있다니….“그나저나 나를 어떻게 찾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파안대소 하며 말했다.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니까 영락없이 그 때 만난 신학생이더라고요. 노틀담대학 측에 알아보니까 ‘시카고에서 골롬반회 신부를 만날 예정’이라는 단서가 나왔어요, 그 때부터 말하자면 FBI 범인추적시스템을 가동한 거지요.”

세계 최고 수사기관이라는 FBI에서 무슨 시스템까지 동원해 내 행방을 추적했으니 ‘빅 서프라이즈’가 맛긴 맞는 것 같다

[평화신문, 제731호(2003년 7월 6일),김원철 기자][편집 : 원 요아킴]


............... 열번 째 이야기.........................


어렵사리 밟은 고국 땅 '실망 투성이'

해방된 내 조국으로 돌아오는 길이 왜 그리 멀고 고달프던가.

괌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것은 1946년 9월이었다. 원래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싶었으나 대구 교구장님의 승낙서가 좀체 도착하지 않는 데다 이래저래 일이 꼬여서 3개월 더 일본에 머물다 귀국 길에 올랐다.

귀국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재일교포들의 분열과 다툼이었다. 36년간 남의 나라 밑에서 설움을 겪다 해방됐으면 이제 한마음이 되어 조국의 미래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재일교포들은 툭하면 좌우로 갈라져 싸웠다. 그 때 일본 주둔 연합군은 한국인과 같은 제3국 인을 일본인보다 우대했다. 가령, 일본인은 맥주를 구입할 수 없어도 한국인은 자유롭게 맥주를 사서 마실 수 있었다. 그런데 교포들은 맥주를 마셔 가면서 회의를 하다 의견이 서로 안 맞으면 맥주병을 깨서 혈투 극을 벌이곤 했다. 그런 소식이 들려 올 때마다 실망스럽고 마음이 아팠다.

귀국하는 한국인을 위해 편성된 동경 발 임시열차에 몸을 실었다. 일본 열도의 제일 서쪽에 있는 구주(九州)지방 하까다에 가서 귀국 선을 타야 했다. 평소 19시간이면 닿는 거리인데 그 임시열차는 서른 대여섯 시간이나 걸렸다.

그 길고 지루한 시간을 도시락 한 개로 버텼다. 하까다에 내리자 안내원들이 우리를 큰 창고에 밀어 넣었다. 가마니가 깔린 바닥에서 모포 한 장과 건빵으로 사흘을 견뎠다.

사흘 후 마침내 귀국 선에 올랐다. 다음날 아침 나절에 부산항이 보였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감격스러워했다. 단 1초라도 빨리 일본인들이 물러간 조국 땅을 밟아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배가 항구에 정박하기도 전에 미군제복처럼 생긴 옷을 입은 청년들이 배에 올라왔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청년들은 우리를 모아놓고 장황하게 일장훈시를 했다. 귀에 들리지도 않았지만 희망찬 조국건설을 위해서 ○○를 해 달라는 얘기 같았다. 화가 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타지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들어오는 사람들 앞에서 무슨 입 바른 소리인가. 여기 있는 사람들 얼굴을 보면 모르나. 며칠 동안 먹은 거라곤 건빵뿐이 없어 쓰러질 판인데.'

내 옆에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 여인이 있었다. 한국에 있는 남편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남편이 어디에 사는지 알아요?" "전에 남편하고 한 번 가본 일이 있어요. 그런데 그 집에 가니까 본처가 있더라고요. 남편이 본처랑 이혼하고 부를 테니 먼저 일본에 가 있으라고 해서 기다렸는데 소식이 없어서요." "그럼 이혼했다는 연락은 받았어요." "아이요. 이혼했으리라 믿고 가는 길이에요."

국적을 떠나서 한 여자를 내팽개친 한국 남자의 무책임한 행동에 또 실망했다.

동포들은 하선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하루 종일 쫄쫄 굶으면서 대기했다. 사무치게 그리웠던 조국 땅을 지척에 두고 바다에 떠서 굶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하선 허락이 떨어져 배에서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깡패들이 몰려와서 승객들의 짐, 특히 부녀자들의 핸드백을 낚아채 가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배에 가둬 놓고 있다 가 어두워진 후에 하선시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본에서 온갖 설움을 겪은 동포들이 조국 땅을 밟자마자 당한 것이 약탈이라니…. 또 한 번 실망했다.

저녁밥이라고 나온 게 밀가루 몇 조각 띄운 멀건 국물이었다. 그것도 한 사람씩 퍼 주는 것 아니라 한 번 마시고 옆 사람에게 그릇을 넘겨줘야 하는 엉터리 배식이었다. 개인화물 하역작업은 새벽 2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그래서 떠밀려 들어간 곳이 큰 창고였는데 구석에 시체 3구가 있었다. 귀국 동포들의 감정이 결국 폭발했다.

동포들은 "우리가 너희한테 밥을 달라고 했 냐, 돈을 달라고 했 냐. 왜 붙잡아 놓고 이 고생을 시키느냐"면서 "차라리 일본으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렇다. 해방 직후의 조국은 법과 원칙도 없이 혼란스러웠다.

아무튼 저녁 늦게 그 실망스러운 자리에서 빠져 나왔다. 그 시간에 어딜 찾아가서 밥 한술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는 곳은 범일성당과 성당 근처 김태관 신부님 집이었다. 이미 고인이 되신 김 신부님(예수회)은 일본 상지대학 선배로서 방학 때 잠시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 집에 도착했더니 저녁식사를 하던 가족이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내 얘기를 듣고는 밥을 먹고 가라고 옷소매를 끌었지만 괜히 예고없이 찾아와서 가족들 밥을 축내는 것 같아 성당 위치를 물었다. 범일성당에 형님(김동한 신부) 서품동기인 신 신부님이 보좌신부로 계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가족들은 "보좌신부의 성은 신씨가 아니라 김씨"라면서 "그렇지 않아도 아까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그 김 신부님이 오신 줄 알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었다. 참 이상했다.

'형님 동기신부들이야 내가 뻔히 다 아는데. 그럼 혹시 형님이….'

성당을 찾아 올라가는데 얼마나 마음이 앞서던지 헛걸음 질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제관 문을 두드렸더니 교리공부를 하고 있던 한 아주머니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아이들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와~ 김 신부님 동생이다"라고 소리쳤다. 형님 책상에 놓여 있는 내 액자사진을 아이들이 본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조금 떨어진 식당 쪽을 향해 "신부님, 신부님, 동생 오셨어요!"라고 외쳤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형님이 맨발로 달려나왔다. 그 반가운 마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는가.

학병에 나가는 나를 부산항에서 배웅할 때 눈물을 보이신 형님이었다. 며칠 동안 굶은 채로 부산항에 내리자마자 그 형님을 만나 밥을 얻어먹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평화신문, 제733호(2003년 7월 20일),김원철 기자][편집 : 원 요아킴]



♣ 갈멜 수도회 수도자들의 삶을 노래한/故 최민순 신부님의 아름다운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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