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수환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연재: 6,7)
작성자 |출발천사
작성일 |2009.03.19
조회수 |1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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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대한 반감에 유학길이 '고생길'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내 연배 신부들 중에 세상을 떠난 이들이 많은데 유독 일본 유학동기 4명만은 지금도 건재하다.
김 정진(은퇴)·최 석우(한국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최 익철(은퇴) 신부가 나와 함께 1941년 일본 상지대학으로 함께 유학을 떠난 신부들이다. 최 석우 신부는 지금도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교회사 연구에 전념하고 있고 최익철 신부는 평생 모은 우표로 하느님 사업에 여력(餘力)을 보태고 있다.
나 역시 밀려드는 강연요청 탓에 바쁘게 살고 있으니 우리에겐 뭔가 특별한 건강비결이 있는 것 같다. 사실은 그 때 한 명(신종호)이 더 있었는데 아쉽게도 사제생활 도중에 환속했다.
당시만 해도 유학 신학생들은 대부분 로마에 가서 공부를 했다. 그런데 주교님들은 일본 식민통치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우리를 일본으로 보내셨다. 아무래도 일본을 잘 아는 신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듯했다.
유학을 떠난다면 마음이 설레야 정상일 텐데 일본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내게는 유학길 자체가 고행 길이었다. 일본 형사들이 부산행 기차 안에서 학생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훑어보고 부산항에서 연락선에 오를 때 몇 번씩 신원조회를 하는 것도 못마땅했다. 배 안에는 막노동 일거리를 찾아 보따리 하나 옆에 끼고 고향을 떠나는 한국인들이 많았다. 다들 옷차림은 남루하고 얼굴은 초췌했다.
그런데 일본 선원들이 통제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발길질을 하면서 욕을 퍼붓는 것을 목격하고는 속이 얼마나 부글부글 끓어올랐는지 모른다.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라서 한층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혼자서 끌탕만 했을 뿐이지 그 자리에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본에 내려 학교에 찾아갈 때까지 불심검문이 대여섯 번도 더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 경찰들은 검문할 때면 매번 나를 건너뛰었다. 나를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일본 사람들과 한참동안 얘기를 하다가도 고향 얘기가 나와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면 한결같이 표정부터 바뀌었다.
내 얼굴이 일본인처럼 생겼나? 난 일본인 취급을 받는 게 무척 싫었다. 일본인들과 구별되게 얼굴에 무슨 표시를 하고 다니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궁리를 했을 정도다.
도쿄에 있는 상지대학(Sohia University)은 예수회가 1913년에 설립한 대학이다. 철학을 전공하기 전에 2년 동안 예과에서 주로 독일어를 공부했다. 신학생 신분이라 여학생과 데이트를 하거나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 기회는 없었다. 공부하는 시간 외에는 그저 동포 친구들과 어울려 우국지사마냥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고 서점에 들러 전공서적을 고르는 게 고작이었다.
어느 날 교정에서 일본인 교수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은 나를 믿고 허심 탄회하게 대화를 제의하곤 했는데 그 날 문득 이런 말을 꺼냈다.
내가 겪어 보니까 한국 학생들은 좀 교활한 면이 있어.
교활하다니요? 교수님 지금 한국은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질 나쁜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이간질시키면서 조종하고 있잖습니까.
조종이라니?
일본 식민정책을 아시잖아요. 한국인은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성과 이름까지 바꾸고 있어요. 일본인 교사가 한국말을 하면서 뛰어 노는 소학교 어린애를 불러다 매질을 했다는 얘기도 들리더군요. 인간인 이상 약자가 강자 앞에서 비굴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저 같은 젊은이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꼭 민족을 위해서만 일을 해야 하나?
그럼 배운 우리가 고통받는 민족 무지 몽매한 민족을 내팽개쳐 두고 무슨 일을 해야 옳은 건가요.
난 목이 메어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마 그 대화를 고등계 형사가 엿들었다면 그 즉시 철창 신세를 져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대화를 엿들은 사람이 있기는 있었다.
며칠 후 독일 출신의 게페르트(Theodore Geert) 신부님이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지나가다 우연히 자네 얘기를 엿들었네. 자네 가슴 속에 뜨거운 불덩이가 있더구만. 잘못하면 화상을 입겠어. 그런 마음으로는 신부가 될 수 없다네.
신부님 민족이 저를 부르거나 제가 민족을 위해 헌신할 기회가 온다면 주저없이 달려갈 겁니다.
아니야 아니야. 내 눈에 자네는 꼭 신부가 돼야 할 사람이네.
게페르트 신부님. 그 분은 잊지 못할 나의 영적 스승 이다. 과묵하고 중후한 인상이었지만 대화를 하다 보면 모성애에 가까운 자애심이 느껴지곤 했다. 언젠가는 내 얼굴이 고독해 보였던지 따로 부르셔서 신부가 되면 더 고독하다. 그 고독을 이겨내는 좋은 방법은 너만의 도서관을 꾸미는 것이다 하시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어보라고 권해주셨다.
게페르트 신부님은 당신도 기회가 되면 한국에 건너가 일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식민통치 시절이라 선교사들조차도 관심이 덜했던 한국을 극진히 생각해주는 마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실제 행동으로 보여 주셨다. 6.25 전쟁 직후 한국에 들어와 1960년 서강대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맡으신 것이다. 신부님은 지난해 여름 일본에서 98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신부님은 정말 나에 대한 사랑이 깊으셨다.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소리내어 울기까지 한 일이 있다. 사제가 되겠다고 현해탄을 건너온 식민지 국가의 제자가 주검으로 변해 돌아올지 모를 전장(戰場)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다.
건강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소중한 것은 잃어버린 후에야 그 가치를 안다.
유학 시절에 무슨 식(式)을 할 때마다 군가 비슷한 노래를 불러야 했다. 전쟁 기간이어서 더 그랬던지 일본 학생들은 그 노래를 우렁차게 부르면서 뜨거운 조국애를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 같은 유학생들은 입만 놀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 '언제쯤 내 조국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생각해보면 참 기가 막힐 일이다.
일본에 적개심을 품고 있는 한국 신학생이 사제가 되겠다고 유학을 와서 일본 전장(戰場)에 끌려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훈련소에 입소해 "쏴!", "찔러!" 구령에 맞춰 총검술 훈련을 받을 생각을 하니 난감하기만 했다. 도대체 누굴 향해 쏘고, 찔러야 한단 말인가.
일본은 1941년 진주만 기습을 감행하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이 날로 치열해지자 학생들까지 전쟁터로 내몰려는 책동을 전 방위적으로 펼쳤다. 심지어 대구 집까지 찾아가서 가족을 괴롭히고, 대구 주교님(일본인 하야사까 주교)에게도 "신학생들의 학병 지원율이 저조하다"면서 압력을 가했다.
이광수, 최남선 같은 저명한 지식인들도 일본에 건너와 유학생들에게 "학병에 입대해 죽을 때에야 조선이 제국의 일원이 될 수 있고, 그리하여 조선인이 황국신민이 될 때에야 신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요지의 유세를 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 유학생들의 적은 일본이었다. 학병지원 압력이 점점 거세지자 우리들은 기가 막힌 '작전'을 짰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지원해서 일본이 주는 밥을 먹으면서 전술을 열심히 익히자. 그리고 중국으로 파병되면 그 쪽에 있는 우리 독립군에 합류해서 일본군과 목숨을 걸고 싸우자."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친구 남규일(전 부산 성모여고 교장)과 '일본 탈출 대작전'을 세웠다. 친구와 함께 보름 동안 동경 역에 나가 기차표를 알아 보았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 차례만 되면 발매가 끝나 버렸다. 짐작하건대 한국인이어서 표를 안 준 것 같았다.
그래서 배를 타고 함경북도 청진으로 가기로 하고 배표를 구했다. 청진을 거쳐 덕원 신학교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형사들이 청진 부두에 상주하면서 눈에 띄는 학생들을 강제 입대시킨다는 소문이 돌았다. 배표를 구하기는 했는데 마침 공교롭게 독감이 걸려서 배를 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먼저 배에 오르는 친구와 약속을 했다. 만일 청진에 내려 강제 지원하게 되면 나에게 '지원했다'고 전보를 쳐주기로 말이다. 얼마 후 그 친구에게서 전보가 도착했다. 첫 전보에는 '지원했다'고 하더니 그 다음 전보에는 '덕원으로 간다'고 적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청진에서 강제로 학병지원서를 쓰고 난 후 여관 방에서 다른 친구들과 독립군으로 넘어가자고 의기투합을 하다가 형사에게 발각돼 감옥으로 끌려간 것이었다.
학병 얘기를 하다보니 팔자(?)를 고칠 뻔한 웃지 못할 해프닝이 기억 난다.
한 친구는 자기만 전쟁터에 가는 줄 알았던지 하숙집에 찾아간 나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난, 수환이 자네가 맘에 드네. 오래 전부터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었네." "무슨 부탁?" "… …"
서울 돈암동 출신인 그 친구는 호주머니에서 누이동생 사진을 꺼내더니 "한국에 가거든 누이동생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가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난 신학생이고, 나중에 신부가 될 사람이라고 설명을 했더니 그제서야 미안하다고 했다. 훗날 그 누이동생과 한국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참 예쁘기는 예뻤다.
나중에 들리는 얘기로는 누이동생은 김(金)씨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 세례명을 나와 같은 '스테파노'라고 지었다고 한다. 나는 속으로 '오빠한데 뭐 들은 얘기가 있나' 하고 생각했다. 마산교구 장 재직시절에도 누이동생은 나를 몇 번 찾아왔다. 어느 날 둘의 관계(?)를 아는 누이동생의 친구가 내게 "저 사람하고 연애했죠?"라고 물어 본 적 있다. 그래서 "연애는 못해보고 할 뻔했다"고 대답해 주었다.
아무튼 내게도 학병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작별인사를 하려고 나의 영적 스승인 게페르트 신부님을 찾아뵈었다. 신부님은 차를 끓여 내오셨다.
"스테파노, 하느님을 원망하는가?" "신부님, 찻잔이 넘칩니다." "예수님도 이 지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께 왜 나를 버리시느냐고 절규했네. 하느님은 결코 자네를 버리시지 않으실 거야."
신부님은 의자에서 일어나 내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축복을 해주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신부님의 손이 심하게 떨리더니 우시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사나이의 울음소리였다. 그분이 식민지 나라의 신학생인 나를 진정으로 아껴 주었다는 사실을 그 때 알았다.
사랑하는 제자를 사지(死地), 그것도 남의 나라 전쟁터에 보내는 스승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난 그 사랑을 감당할 수가 없어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왔다.
서강대 설립자이시기도 한 게페르트 신부님은 지난해 여름 일본에서 돌아가셨다. 서강대에서 봉헌된 영결미사를 내가 집전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마지막으로 찾아뵈었을 때도 내게 "한국과 한국교회, 그리고 한국의 제자들을 위해 늘 기도한다"고 말씀하셨다. 신부님의 유해는 서강대 도서관 옆 로욜라 동상 밑에 봉안돼 있다.
문득 옛 스승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계속>
[평화신문, 제729호(2003년 6월 22일),김원철 기자]
[편집 : 원 요아킴]
♣갈멜 수도회 수도자들의 삶을 노래한 / 故 최민순 신부님의 아름다운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