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공식 추도기간이 부활대축일로 끝납니다.
평화신문에 연재되었던 글을 굿뉴스에서 발췌하여 추모기간 동안
연재할 예정입니다. 추기경님께서 인터뷰 형식으로 지난 시절을 회고한
글입니다.
다시 한번 추기경님께서 살아 오신 진솔한 삶의 모습을
느끼며 추기경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첫번째 이야기..........
진솔한 삶을 사신 김수환 추기경 1
유년기의 추억
"신학교 갔지만 신부될 생각은 없어"
나는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을 무척 좋아한다. 산등성이로 석양이 기우는 풍경은 내 고향이고 내 어머니이다.
유년시절 첫 기억은 서너 살 무렵, 경북 선산에 살 때이다. 어머니는 곡마단이 들어온 읍내 공터 구석에서 국화빵을 구워 파셨다. 난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어머니가 장사하는 모습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옹기를 팔러 장에 나간 어머니가 해질녘이 되어도 안 돌아오시면 큰 길로 나가서 어머니가 나타나실 고갯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늘 그 시간이면 서쪽 고갯마루에 석양이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우리 집안은 조부 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본관이 광산(光山)인 조부 보현(요한) 공은 독실한 신자로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논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하셨다. 그 바람에 나의 아버지(김영석 요셉)는 유복자로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당시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그랬듯이 옹기장수로 전전하다 대구 처녀인 어머니(서 중하 마르티나)와 결혼해 대구에 정착하게 되었다.
난 6남 2녀 의 막내인데 가난 때문에 이사를 자주 다녀서인지 고향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나기는 했으나 서너 살 때는 경북 선산에서 살았다. 추측하건대 선산에서도 셋방살이를 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가', '다른 집 애들은 점심을 먹는데 난 왜 굶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가난을 뼈저리게 느꼈을 터인데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선산에서 어린 나이에 항일전쟁(?)을 치른 적이 있다. 집 가까이에 일본 아이들이 다니는 소학교가 있었는데 바로 위 형과 그 아이들간에 싸움이 붙었다. 그 싸움판에 끼어 있다 가 일본 아이들이 던진 돌에 이마를 맞았다. 그 때의 흉터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요즘도 가끔 사람들에게 흉터를 내보이면서 '항일 독립운동의 상처'라고 농담을 한다.
5살 무렵에 구미와 가까운 군위로 이사했다. 선산에서 군위로 이사 가느라 큰 고개를 넘은 기억이 선명하다. 군위에서 석양이 지는 고갯마루를 볼 때면 '저 너머에 고향이 있는데…'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태어난 곳이 대구임에는 틀림없지만 고향으로서 대구에 대한 추억은 별로 없다. 특히 유신반대운동을 할 때 고향 사람들이 나를 못마땅하게 여겨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충청도 사람이다. 아버지가 "순한아~"라며 나를 부르는 억양이 특이했던지 동네 사람들은 내가 나타나면 아버지 억양을 흉내내곤 했다. 내 이름이 '수환'이란 사실은 나중에 호적을 떼어 보고서야 알았다. 동네 사람들 싸움을 잘 말리고, 바둑과 장기 두는 것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해수병으로 돌아가셨다.
그 때 아버지를 위해 연도를 바치던 어머니 음성이 기억 난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청국(淸國)으로 보내 달라"고 기도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동네에 장사를 하는 청나라 사람이 살기는 했지만 죽은 아버지를 왜 그 사람들 나라로 보내 달라고 하는 건지…. 나중에 알고 보니 '천국(天國)'을 '청국'으로 잘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나와 3살 차이가 나는 형 동한과 어머니는 내 유년시절의 전부나 다름없다. 다른 형들과 누이들은 돈 벌러 일찍 객지로 나가거나 철이 나기 전에 출가를 해서 그런지 깊은 정이 들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깊게 인간적 관계를 맺은 상대를 꼽으라면 단연 동한 형이다. 형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소신학교에 갈 때까지 한 번도 헤어져 본 적이 없다. 형은 참 좋은 사람이었고, 더할 나위 없이 동생을 사랑해 주었다. 형제들은 싸우면서 자란다지만 난 형과 싸운 기억이 전혀 없다. 형이 소신학교에서 공부하다 방학 때 집에 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왜정 때 내가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자 내 손을 잡고 엉엉 울던 형, 나보다 앞서 신부가 된 후에는 '순진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모르겠다'는 핀잔을 들어가면서 결핵환자들을 돌보던 형, 동생이 추기경이 되자 행여나 불편을 끼칠까 봐 일부러 피하셨던 형…. 형 김 동한 신부는 참으로 사람을 사랑하시다 일생을 다하신 분이다.
유년시절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참으로 절대적이었다. 어머니는 당신 이름 석자와 하늘 천(天) 따지(地) 정도의 글자 밖에 아는 것이 없었고, 가난 때문에 거의 평생토록 옹기와 포목을 머리에 이고 팔러 다니셨다. 그러나 곧은 신앙심과 여장부같은 기질만은 대단하셨다. 그런 어머니 무릎에서 신앙심을 키우고 인간으로서 기본교육을 배운 것을 하느님께 감사한다.
성품이 곧으셨던 어머니는 자식 교육에도 매우 엄격하셨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밖에 나가 '아비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더 엄격하게 자식들을 키우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편애(偏愛)이다 싶을 정도로 이 막내 아들에게 사랑을 쏟으셨다. 막내 아들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애쓰시는 것이 싫어서 어느 해 여름에는 "과일 먹으면 자꾸 배탈이 난다"고 거짓말을 하고 과일을 입에 대지 않았다.
동한 형이 소신학교에 간 후로 어머니와 단 둘이서 살았다. 밤이 되면 어머니는 보통 1~2시간씩 기도를 바쳤는데 난 옆에서 뜻도 모른 채 꾸벅꾸벅 졸면서 중얼중얼 댔다. 그 때 기도하다가 엄마 등 뒤에서 잠드는 게 내 특기였다. 기도하기 싫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성서나 옛 성인의 이야기, 또는 우리 나라 고담 중 효자 전을 들려주시곤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면 속으로 '나도 성인되고, 효자돼야지'하고 다짐하곤 했다.
한 번은 찰고(擦考)를 앞두고 교리문답을 외워 놓지 않아 어머니에게 혼난 적이 있다. 그 때 효자 전 이야기가 생각나 버드나무 회초리를 만들어 어머니에게 갖다 드리고는 "이 불효자를 때려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매를 드시는 대신 다시 한 번 조용히 타이르는 것으로 잘못을 용서해주셨다.
어머니의 젖 무덤을 만지며 응석을 부린 기억은 없다. 그래도 어머니는 내 엉덩이를 두드리면서 "어이구 내 강아지, 내 강아지"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우리는 늘 초가삼간에서 살고, 한때는 셋방살이도 했지만 어머니는 그 옹색한 집에서도 공소를 열었다. 봄 가을 두 차례 방문하시는 신부님을 모시는 관계로 우리 집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도배를 하고 살았다. 그것도 봄 가을 두 번씩이나 말이다.
그 때 신부님 방문은 임금님 행차나 다름없었다. 신부님이 오시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찬미 예수님"하고 인사를 했다. 식사 때면 평소 구경도 못해보던 반찬이 신부님 밥상에 올라왔는데 나중에 그것을 얻어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형과 내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닐 때였다. 대구 친정에 다녀오신 어머니는 두 자식을 불러 앉히고는 천청 벽력같은 말씀을 하셨다. "너희는 이 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거라."
훗날 짐작하건대, 어머니는 대구 시내에서 장엄한 사제서품식 광경을 보신 후 감동을 받으셨던 것 같다. 형은 이듬해 흔쾌히 대구에 있는 신학교 예비 과(초등 5, 6학년)로 옮겼다. 나도 2년 후 형을 따라 신학교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단지 어머니 명에 따른 것이지 신부가 될 생각은 없었다.
어릴 적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읍내 상점에 취직해서 5~6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한 후 25살이 되면 장가를 갈 생각이었다. 어머니한테는 한 번도 말씀 드린 적이 없지만 내 나름대로 골똘히(?) 생각해서 구체적으로 세워 놓은 계획이었다.
그 계획에 미련이 남아 있었던지 신부가 된 후에도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집을 보면 부럽기만 했다. <계속>
[평화신문, 제724호(2003년 5월 18일),김원철 기자]발췌
..........두번째 이야기.......
5학년 마치고 5학년으로 입학 ... '낙제'한 셈
반세기 넘게 걸어온 성직자의 길. 하느님께서 부족한 나를 도구로 쓰시기 위해 넘칠 정도로 많은 영광과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을 생각하면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 첫 걸음을 되돌아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스님들은 머리 깎고 출가를 한다지만 난 '가출'을 해서 신부가 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군위에서 5학년을 마칠 무렵이었다. 난 곧 동한 형의 뒤를 따라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예비과)에 진학하기로 돼 있었다. 그 무렵 어머니가 볼 일이 있어 며칠 동안 대구에 가 계시는 바람에 달수(큰형) 형님하고 단 둘이 집에 있었다.
다른 애들은 밥 먹고 학교에 가는데 달수 형님은 밥 차려 줄 생각은 안하고 "밖에서 뭐 사 먹고 학교에 가라"면서 5전인가 주었다. 그 때 액자 뒤에 감춰 둔 10전이 내 수중에 있었다. 그걸 합쳐서 주머니에 찔러 넣고 대구까지 130리 길을 걸어갔다.
어차피 조만간 학교를 그만두고 대구로 옮길 테고, 어머니도 보고 싶고 해서 형한테 말 한마디 없이 길을 나선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은 자동차가 아니라 마차를 타고 대구에 다녀왔다. 혹시나 해서 마차와 마주칠 때마다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도중에 배가 고파서 5전을 내고 떡을 샀는데 그걸 다 먹지 못해 손에 들고 뚜벅뚜벅 길을 걸었다.
내 뒤에서 자동차가 뽀얀 흙먼지를 날리면서 다가 오길 래 차를 세웠다. 운전사한테 남은 10전을 내보이면서 "아저씨, 요만큼만 태워 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대구에 가는 길인데 거기까지 태워 달라고 하면 될 걸 고지식하게 10전어치만 태워 달라고 했더니 운전사는 정말 10리쯤 가서 나를 내려 주었다. 나나 운전사나 고지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또 걸었다. 아무튼 아침에 군위에서 출발해 해가 지기 전에 대구 시내 누나 집에 도착했다. 뜬 금없이 철부지 막내동생이 나타나자 누나는 화들짝 놀라면서 "엄마는 오늘 군위로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네가 왔 냐"고 말했다.
어머니는 내가 대구에 간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이튿날 부리나케 누나 집으로 찾아오셨다. 그 바람에 군위로 돌아가지 않고 누나 집에서 한동안 머물다 곧장 소신학교에 들어갔다. 결국 어머니를 만나러 홀로 130리 길을 걸은 것이 신학교 가는 길이 되었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는 초등학교 5, 6학년 과정이었다. 군위에서 5학년을 마치고 들어갔는데도 학교측에서 입학시험 성적이 형편없었던지 5학년 과정부터 밟으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낙제를 해서 5학년을 두 번 다닌 셈이다.
예비과 생활이라는 게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고,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것이었으니 그 어린 나이에 재미를 부칠 리가 없었다. 기숙사는 또 왜 그렇게 덥고, 추운지….
기숙사는 난방시설이 안 돼 있어서 겨울이면 잠자리에 드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솜옷을 껴입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가 좀 따뜻해지면 일어나서 옷을 벗어 놓고 자곤 했다. 옷을 껴 입은 채로 곯아 떨어지는 날도 많았는데 그럴 때면 땀을 많이 흘려 이불이 흥건히 젖었다. 그걸 낮에 내다 널면 날씨가 추워서 그대로 얼어 버렸다. 그런 날 밤 얼음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건 더 고역이었다.
하루는 신학교에서 쫓겨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1원짜리 동전을 갖고 꾀를 냈다. 어차피 내 의지로 들어온 신학교가 아닌데다 난생 처음 떨어져 살아서 그런지 어머니가 몹시 그리웠다.
당시 우리는 규칙상 개인적으로 돈을 갖고 있을 수가 없었다. 돈은 모두 담당 신부님께 맡겨 놓아야지 만일 돈을 갖고 있다 들키면 집으로 쫓아 보낸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
어느 날 아침, 새로 갈아입은 윗도리 주머니에서 딱딱한 뭔가가 손에 잡혔다. 뜻밖에도 1원짜리 동전이었다. 난 '악마'가 시키는 대로 책상서랍을 열고 가장 눈에 잘 띄는 자리에 그 동전을 놓아두었다.
'오후쯤이면 호랑이 신부님이 불러서 당장 보따리 싸라고 호통을 치시겠지.'
생각만해도 신이 났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밥을 먹고 돌아와도, 밖에 나가 운동을 하고 돌아와도,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도 신부님이 부르질 않았다. 결국 그 동전을 학교 담장 밖으로 던져 버렸다. 1원짜리 동전을 갖고 부린 잔꾀는 실패로 돌아갔다.
서울 동성상업학교 시절에는 꾀병을 부려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신부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 않아서인지 공부에도 별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발목을 놓아주지 않으신 걸 보면 성직자의 길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던 같다. <계속>
[평화신문, 제725호(2003년 5월 25일),김원철 기자][편집 : 원 요아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