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고 존경하는 추기경님.
추기경님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팬들이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놀랐습니다. 전국 각 교구의 성당과 빈소에 추기경님과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며 밀려드는 인파가 끝이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우들만이 아니라 온 국민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의지하던 아버지 같은 분을 잃은 슬픔에 젖어 있습니다. 마음이 너무 휑하여 안절부절 못하고, 집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어 성당으로 빈소로 모여와 몇 시간씩 기다리며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해 드리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명동만이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바다 건너 제주에서 조차 조문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살이가 너무 어렵고, 희망은 안보이고, 어디를 봐도 의지할 데가 안 보이니, 추기경님의 떠나심이 더욱 안타깝고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지난 2년여 동안 추기경님이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 하시고 급속도로 체력이 약화되시다가 7개월 전부터는 퇴원도 못하신 채 계속 병실에 붙잡혀 계시니 참으로 애처로웠습니다. 갈수록 초췌해지시는 모습을 뵈면서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식사할 힘도 식욕도 없으시고, 소화도 안 되시고, 배설도 당신 뜻대로 안되시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신체기능이 거의 마비되어 가셨습니다. 마침내는 영양이 부족하여 당신 힘으로 일어서지도 못하셨습니다.
화장실만은 당신 힘으로 가시려던 마지막 자존심마저 포기하시고 당신 몸을 온천히 다른 사람에게 내맡기셨습니다. 노환이라고는 하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호흡곤란과 혈액 내 산소 수치 저하로 가쁜 숨을 몰아쉬시며 무척이나 힘든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추기경님은 계속되는 육신의 한계 상황을 온 몸으로 겪어 내시며 정신적으로도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홀로 힘겹게 싸우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싸움은 저희가 아무도 도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런 추기경님 모습을 뵈면서 하느님께 투정 섞인 넋두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우리 추기경님 무슨 보속할 것이 그리도 많아서 이렇게 길게 고난을 맛보게 하십니까? 추기경 정도 되는 분을 이 정도로 족치신다면 나중에 저희 같은 범인은 얼마나 호되게 다루시려는 것입니까? 겁나고 무섭습니다.”
몇 주일 전에는 ‘주님, 이제 그만하면 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 추기경님 좀 편히 쉬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추기경님의 고난이 왜 필요했는지를!
지금 추기경님은 당신의 투병생활과 죽음을 통하여 경제위기와 사회불안으로 깜깜하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국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주기 시작하셨습니다. 특히 도산과 실직, 절망과 불안의 골짜기를 걷고 있는 모든 어려운 이들이 추기경님의 생전의 가르침과 행적에 희망을 찾고 용기와 힘을 얻으면서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명동으로, 전국의 성당으로 모여왔습니다. 추기경님의 고난이 있었기에 추기경님의 부활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 이 세상에 살아계시며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을 때보다 지금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추기경님 말씀을 음미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추기경님은 이제 혜화동 할아버지가 아니라 한국의 할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추기경님은 젊은 시절부터 간직하신 한 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복음을 말로써 가르치는 것보다 그들 곁에서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사시는 것이었습니다. 주교직에 오르고 추기경직에 오르시며 그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당신 영혼의 밑바닥에서 누구보다도 당신 자신에게 큰 빚을 지고 사셨습니다. 연세가 높아지신 다음에는 도저히 그 빚을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아시고 “요 모양 요 꼴”이라고 탄식하시고, 당신 자신에게 ‘바보야!’라고 읊으셨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추기경님, 저는 믿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 어서 오너라, 내 사랑하는 바보야! 그만하면 다 이루었다!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
평안히 가십시오, 추기경님.
그리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시면 당신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애틋하게
사랑하셨던 우리 백성을 위하여 주님께 간구하여 주십시오.
2009년 2월 20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