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의 큰 어른, 아니 나라의 큰 어른이라고들 일컫는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다.
하루 14만명이 넘는 장사진의 조문객들... 가톨릭 신도들뿐이 아니고 남녀노소, 빈부, 여야, 정파, 종교에 상관없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문객들이 시신이 안치된 명동 성당에서 걸어 30분 넘는 먼 거리까지 길게 줄지어 서서 3시간 넘는 긴 시간동안 영하의 엄동설한에 떨면서 조용히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차례를 기다리며 걷는 모습 그 자체가 진풍경이다.
나는 60년대 말 대학 시절 그분이 추기경으로 서품되신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그 명동 성당에서 집전하시던 한 미사 때 미사해설자로서 옆에서 봉사하며 가까이 뵙게 된 인연을 시작으로, 그동안 추기경의 사목방문 또는 각종 행사에서 멀리 혹은 지근거리에서 그 분을 뵈오며 그 분의 음성, 미소, 온화한 카리스마, 깊이 있는 영성의 가르침과 위트 넘치는 유머에 오랜 세월 감동해왔기에, 명동성당에 안치된 그분의 시신을 두 번 찾아 뵙고 기도하면서도 계속 아쉬움을 달랠 길 없었고, 또 조문 행렬과 생전 그분의 영상을 계속 비춰주는 TV를 보면서 마치 아버지를 여읜 아이처럼 문득문득 눈에 이슬 맺히고 목이 메이는 슬픔을 느꼈다.
이 세상에 추기경 또는 고위성직자는 많은데 무엇이 그 분을 이토록 사람들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존경하며 따르게 만들고 그분을 위대하게 만든 것일까? 박정희 정권 등 소수의 권력자가 독재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시절, 그 분은 간결하지만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말씀으로 민주화를 갈망하는 국민들에게 희망과 함께 독재에 짓눌리던 답답한 가슴에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주시곤 하였다. 이념이나 교과서적 가르침이 아닌, 현실에 바탕을 둔 상식 넘치는 지성인의 소리이자 시퍼런 독재의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발하는 용기 넘치는 신앙인의 목소리였기에, 그 분이 하는 말씀에는 여야, 군인, 공무원, 민간인 없이 모두 다 맘속으로부터 감복했던 것이다.
그 분이 높은 지위에 계시면서도 국민 모두에게 정답고 다정하게 다가왔던 이유 한 가지는, 그 분께서 항상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현실 있는 그대로 모든 상황과 사태를 상식적으로 파악하고, 사물이나 사람을 있는 그대로 벽이나 차별을 두고 보지 않으시면서, 항상 없는 자, 아픈 자, 버림 받았거나 소외된 이들 곁에 다가가려고 어떤 상황 하에서도 꾸준히 노력을 하셔서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분은 어릴 때 신학생이 되어 신학교에 입학한 이후 사춘기를 보내면서 한 남자로서 이성에 대한 문제, 결혼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던 것을 자연스럽게 숨기지 않고 고백하시곤 하였다. 이러한 자신의 문제를 숨기거나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았고, 스승이나 지도신부께 고백하면서 마침내 성소에 대한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는 과거 신학교 젊은 시절의 과정을 주위에서 물을 때마다 감추지 않고 밝히시곤 하였다. 사제가 된 이후 산기슭 오두막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볼 때면 소박하고 단란한 한 가정의 행복을 포기한 한 남자로서의 아쉬움을 토로하시기도 했는데, 그러한 모습은 내게 애잔한 감동을 줌은 물론 같은 남자로서 그분의 진솔한 인간적 매력에 더 흠뻑 빠져들게 하곤 하였다. 추기경은 일제 시기 어릴 적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한 5~6년 상점에 취직하여 장사를 배우고 난 뒤 전국을 다니며 장사로 돈을 벌어 25세쯤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했다. 그 착하디 착하고 소박한 시골 소년의 마음... 그러나 일찍이 홀로되신 어머니의 간곡한 타이름에 순종하여 사제의 길로 가기 위해 소신학교에 진학하던 효심, 계속 신부가 될 때까지 고민하였지만 끝까지 잡념을 이겨내고, “사제가 되어라.”라는 양심의 소리를 따르면서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대로 성소의 길로 매진하게 되었다고 하시던 그 분의 잔잔하면서도 진실된 고백은 얼마나 우리 마음을 애잔한 연민으로 가득하게 했던가! 그러면서 가수 김수희의 “애모”를 빙긋이 웃는 얼굴로 열창하실 때는, 그분은 추기경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만나는 털털하면서도 다정한 이웃집 아저씨 또는 맘씨 좋은 보통 할아버지처럼 친근하게 우리 옆으로 다가오곤 하셨다.
그 분의 위대함은 진리를 따르는 길 그리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야하는 인생 여정에서 위선적이거나 이중 생활적 태도로 나가지 않고, 오히려 다가오는 유혹 또는 번민을 있는 그대로 부딪치면서 자연스럽게 소화하고 승화시키려 노력하셨다는 점이다.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양심적 호소를 따르려 최대한 노력하되, 그렇다고 부족한 주위의 사람들을 업신여기거나 가볍게 대하지 않았고, 신앙의 지도자로서 고위 성직자 생활을 하시면서도 특별 대우를 받는 귀족 정신에 빠질까 항상 자신을 경계하였으며, 국민들이 궁핍이나 변고 등 어려움을 맞을 때마다 친구 또는 아버지처럼 다가가 그들과 동감하면서 구체적으로 힘을 다해 도와주곤 하셨다는 점은 사후 더욱 널리 알려지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국민들이 처한 궁핍이나 질곡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구체적으로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돕는 우정과 사랑 안에서, 그들이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구원의 힘을 느낄 수 있도록 젊은 사제 때부터 도우려 노력해온 점이 다른 사람과 달리 그분을 위대하게 만든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신앙의 지도자로서 성경이나 전통적 교리를 전하고 가르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신앙의 정신이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점을 생각하면서, 모든 국민이 자유와 존엄성에 있어 결코 침범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생각으로, 서슬 시퍼런 독재자의 힘에 굴하지 않고 소리 높여 호소 또는 비판하던 점은, 그 분이 자신의 신앙과 일생의 삶을 통일된 하나의 원칙으로 살고자 노력하셨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람이 원칙을 정하고 따르고자 하더라도 사정에 따라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하기 쉽고, 또 융통성 있게 타협하다 보면 결국 원칙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기도 하는데, 스스로 믿고 따르는 신앙의 원칙과 가르침에 충실하면서 신앙인으로서 자신이 얼마큼 그리스도를 닮고 보여주는 일에 투철한지 끊임없이 자문하고 반성하는 모습,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남에게 상처줄 수 있었던 점에 대해 자주 미안하다고 고백하시던 것을 잊을 수 없다.
약 220여 년 전에 몇몇 조상들의 손에 의해 이 땅에 들여온 가톨릭 신앙이 온갖 수난과 박해를 이겨내고 이렇게 국민들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는 큰 인물을 배출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김수환 추기경이 바로 1868년 무진년 박해 때 순교한 김보현 순교자의 유복자가 커서 낳은 자녀들 중 막내아들이라는 점은 하느님의 섭리가 느껴지는 신비스런 부분이다.
숱한 가치관이 충돌하고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연일 정쟁이 끊일 줄 모르는 사막과 같은 한국의 현실에서 큰 오아시스처럼 모두를 품에 안고 다독여가는 매력과 감동을 보여주신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의 서거를 맞아 모두들 마음 속 깊숙이 숨어있는 자신의 양심을 두드려 일깨우고, 오늘 내가 종사하고 있는 일 또는 생활이 과연 얼마나 참된 진리, 신앙, 또는 믿고 따르는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되고 있는지, 또 이웃과 사회 또는 국민들에게 얼마나 유익하게 봉사하고 있는지 자문하면서, 몸과 마음을 경건히 여미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김수환 추기경의 평안한 안식과 그리고 하늘나라에 어서 오르시어 우리나라의 평화통일과 번영을 위해 끊임 없이 기도해주실 것을 믿고 바라고 기도하며..... 김수환 추기경 서거 4일째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