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80학번 세대의 추억 ------------
보통 70, 80학번대 사람들은 비슷한 지난 일들을 공유하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앞의 강길웅 신부님은 글을 올리고 나니 저도 옛날 생각이 나서 급히 몇 자 적었습니다.
사실 저희 홈피가 너무 엄숙, 근엄하고, 성모님도 성모의 밤을 앞두고 들르셨다가 글들의 영성이
모두 훌륭하지만 혹여 지루해 하실 것 같아 옛날이야기 하나 올립니다.
강신부님처럼 우리가 학교 다닐 때도 항상 거버 이유식 - 김치병에 계란후라이가 도시락 반찬 전부였다. 책들은 김치 국물에 물들고... 계란도 못 싸오는 친구들도 꽤 많았다. 국민학교 3,4학년때는 점심 굶는 애들도 많아서 정부에서 주는 옥수수빵도 먹고.. 맛이 기가 막혀서 나도 그 친구들과 도시락을 바꿔 먹곤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면 보충수업도 하고 모두들 머리 싸매고 공부할 때이다. 다른 학교도 보충수업이다 뭐다 다들 난리였는 데, 우리 학교는 오후 3시 30분이면 고3 수업이 끝이었다. 공부란 선생님에게서 많이 배우는 것 보다 혼자 스스로 공부하며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학교에서는 다른 학교보다 일찍 수업을 끝내 주었다.
그러나 실상은 따로 있었다. 당시 서울의 사립 중 가장 명문이었던 모교의 선생님들 중 많은 분들이 밤에는 장안에서 날리던 특급 과외선생님이셨기 때문에 저녁에 과외를 두세군데 뛰시느라 수업을 마치고 좀 쉬었다 나가시려고 학교 수업을 일찍 끝내 준 것이다. 학생들은 그 사실을 거의 다 알고도 모르는 척 해 드렸다.
언젠가 어떤 선생님이 “야 너희들 말이야 집에 돈 있으면 과외해서 대학가는 거고, 돈 없으면 도서관에서 혼자 독파해야 해. 머, 불공평하다고? 야 임마, 인생이 원래 불공평한거야, 알겠어?” 하신다. 그 때에도 과외 많이 하던 친구들 한달 과외비가 대학 한학기 등록금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인생이 원래 불공평하다는 것을 일찍 알았다.
그래도 학교에서는 미안해서인지 고3 전용독서실을 만들어 주고 한 달에 삼천원인가만 내면 저녁으로 국, 밥, 그리고 김치를 먹을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 선생님들은 우리를 다 큰 성인으로 대해 주셨고 인격 형성에도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방과 후 우리는 모름지기 체력이 있어야 입시라는 장기전에 대비한다며 먼저 2시간은 축구도 하고 그렇게 놀았다. 그러다 6시, 식당에 가장 먼저 가 저녁밥을 타 먹는다. 그리고는 식사 후 막바로 공부하면 소화도 안 되고 건강에 나쁘다며 뒷산(지금의 삼청공원)에 오른다.
달이 뜨면 비원 담 넘어가 달구경하고... 숲속에서 놀러온 대학생 데이트족에게 데이트 왔으면 손은 잡고 걸어야지 손을 왜 안 잡고 가냐고 괜히 트집 잡기나하다가 저녁 9시쯤에야 도서관에 내려온다.
그런데 6시에 밥 먹었는데 어찌 이리 배는 잘 꺼지는지... 친구들은 저녁 9시가 되어도 배고픈데 공부가 되겠냐며 도서관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한 녀석이라도 눈짓을 하면 아예 책가방을 싸들고 학교 뒷문으로 나가 중국집으로 간다.
그 당시에는 까까머리라 술을 마시려 해도 어디에도 갈 수가 없다. 다만 옛날 중국집은 대개 2층에 다다미방이 있었고 거기에서 교복을 벗어 숨기고 휴가 나온 군인처럼 하고 고량주를 마실 수 있었다. 안주는 항상 군만두, 주인에게 아양 떨어 건대기 있는 짬뽕 국물이라도 얻어 마시면 그날은 속칭 대길인 날이다.
그런데 항상 안주가 모자랐다. 왜냐하면 일단 가진 돈을 모두 털어서 고량주 마실 돈을 제껴 놓고 남는 돈으로 안주를 시켜야했기 때문이다. 쌍합관이라는 이름의 그 중국집을 얼마나 발이 닳도록 다녔던가... 어느 날 밤 한 친구가 외쳤다. “야, 난 이렇게는 도저히 못 살겠다.” 우리는 그 친구 얼굴을 바라보았다.
“야, 난 여기 안 온다!”, “잉, 안와?” “그 대신 한달 돈 모아서 다시 오자. 우리도 탕수육도 좀 먹고 사람답게 살자.” 그 후 모두들 그 친구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래 사람답게 살아야지.. 이 놈 참 대단한 놈이다.' 그 친구는 그 후 꽤 폼을 잡고 다녔다.
우리는 두 달 정도 삼청공원에도 안가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도서관 다른 친구들이 우리를 걱정했다. 쟤들 갑자기 이상해졌다고... 두 달 후 돈이 좀 모였다. 우리는 어깨에 힘을 주고 중국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리는 화교인 주인을 호기 있게 불렀다. "여기 고량주 5병에 탕수육 둘....근대 탕수육이 얼마지?" 당시 탕수육이 700원 정도로 기억된다. 두 그릇은 고사하고 한 그릇 시키기에도 돈이 모자란다.
나는 그때 사람답게 살자는 그 친구의 얼굴을 보았다. 너무 실망한 그 얼굴... 두 달을 어렵게 돈을 모아 온 건데... 결국은 또 못 먹나..
나는 주인을 다시 불렀다. “아저씨 탕수육 500원에 안돼요?” 그 화교 주인 그 전엔 안 그러더니 갑자기 고함을 친다. 탕수육 깎는 사람 처음 보았다며 절대로 안 된다고. 그냥 나가라고 한다. 하기야 아들 나이밖에 안 되는 놈들이 몰래 와 술 마시는 것을 좋게 보았을 리가 없다.
“아니 아저씨, 깎자는 것이 아니라, 돼지고기를 조금만 넣고 밀가루를 많이 넣어서 500원짜리로 만들어 주면 되잖아요.” 그제야 주인은 나중에 딴 소리하지 말라며 간다. 드디어 탕수육이 나왔다. 침묵이 흐른다. 막 먹으려는 데, 그 때 사람답게 살자던 녀석이 갑자기 스톱을 건다. 배고픈데 안주만 먼저 먹으면 나중에 술이 남으니 문제라는 거다.
그래서 한 명이 구령을 붙였다. “술” 그러면 한입에 술잔을 털어 넣고, “안주”하면 동시에 한사람이 탕수육을 딱 한번 집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탕수육이 덩어리가 큰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는 데, 젓가락 두개가 큰 덩어리를 동시에 잡으면 누가 먹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결국 둘 다 못 먹는 거로 했다.
그러니 기가 막히게 안 부딪치며 지나간다. 그 날 밤 우렁찬 구령에 맞추어 다들 행복해 했다. 그 후 우리는 한 달에 한번 쌍합관이라는 그 중국집에 계모임 하듯 규칙적으로 다녔다. 덕분에 공부하는 것도 약간은 규칙이 잡혀갔다.
어느새 대학 원서를 쓰는 날. 우리들은 모두 담임선생님 책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야 임마, 네가 이 원서 쓰는 대로 들어가면 내가 네 아들이다, 네가 내 아버지 되는 거란 말이야, 알았어?” 쌍합관에나 다니다 소위 SKY대학 중에도 법대, 상대 등 가장 힘든 곳에만 응시하겠다니...우리는 읍소하고 읍소해서 원서를 받아냈다. 하지만 모두 낙방하였다. 당연한 결과...인과응보...
우리는 쌍합관 이층에 다시 모였다. 그 때 한 친구가 또 외쳤다. “야, 우리는 흩어 져야 살고, 뭉치면 죽는다! ” 그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승만 대통령 말씀도 맞지만, 네 말도 맞다. 그 후 우리는 재수해서 대학갈 때까지 재수학원도 같은 학원에 안 다니고 각기 다른 학원과 집으로 흩어져 죽어라 공부해서 모두 원하는 대학에 갔다. 그 사이 절대 안 만났다.
역시 이승만 대통령은 훌륭하신 분이다. 거꾸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우리의 은인이셨다.
대학교 1학년. 모두 정신없이 다른 대학이나 학과에 다니다 보니 옛날 쌍합관 친구들이 그리워, 우리는 어느 날 명동성당에 올라가는 샛골목에 있는 중국집에 모였다. 그날도 이층 구석방에 자리를 잡았다. 모두들 오랜만이라며 탕수육과 군만두를 구령에 맞추어 먹고, 너무들 행복해 했다.
그러나 나갈 때가 되어 돈을 모아 보니 턱도 없이 모자랐다. 서로 숨겨둔 돈이 있으려니 믿었는데, 큰 일이 난 것이다. 그 때 한 친구가 “어, 여기 창문이 열린다” 하며 아래를 내려다본다. 약간 불안해 보이지만 슬레이트 지붕을 조심스레 밟고 내려가면 될 것 같았다. 한명 두명 차례로 지붕을 타고 내려갔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어벙한 놈이 내려오다 슬레이트 가운데를 밟아 그만 슬레이트가 깨지며 그 아래 식당 주방으로 떨어졌다. 채소 다듬던 아줌마들이 놀라 넘어지고 난리가 났다.
우리는 한참을 도망가다 결국은 격론 끝에 다시 그 중국집으로 돌아갔다. 친구가 잡혀있는데, 도저히 우리만 갈수는 없었다. 가보니 어벙이가 다른 손님들 보는데서 무릎을 꿇고 손들고 벌서고 있었다. 그 날 우리는 중국집에서 밤 늦게까지 설거지에 걸레질 하며 온갖 청소를 다하고야 겨우 풀려났다.
“우리는 역시 뭉치면 망하는 구나“ 이건 이제 경험칙에 의해 입증된 것이었다.
우리는 그 후 헤어져 대학 4년 동안 한 번도 동시에는 만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유신시절이라 데모도 많았다. 구치소로 갈 녀석은 결국은 갔고...우리는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책도 참 많이 읽고 명동 필하모니, 쉘부르, 오비스케빈, 티롤, 피맛골 함흥집, 열차집, 학림다방에서 살다시피하며 대학시절을 보냈다. 내용도 잘 모르면서 프랑스문화원, 독일문화원에서 그리고 세실에서 마치 문학사조에 통달한 양, 아는 척 연극과 영화도 많이 보며 지냈다. 각자 그렇게 살다 졸업식이 돼서야 처음 보는 친구도 있었다.
그 후 사회에 나가서는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며 다들 큰 성공은 아니지만 늦게나마 공부하며 각자 만족해 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만족하며 사는 지혜를 배웠는지도 모른다. 교회와 성당에 열심인 친구들이 많다. 그중 한 친구는 이상한 선교회 꾐에 빠져 휴거가 온다며 미국 LA에서 한달을 단식기도하다가 저 구름위로 가장 먼저 올라갔다. 한국과 미국 신문에 동시에 기사가 나간 유일한 친구다. 참 좋은 친구였는 데...
그 때 슬레이트 아래로 떨어진 친구는 국내에서 개업하다 뒤늦게 유학 가서 지금은 미국에서 내과 의사를 한다. 작년 여름엔 LA에서 처음으로 모두 모였다. 그 때에도 우리는 술 한 잔하며 다들 마음속으로 긴장했다. ”이거 타지에서 무슨 사고치는 것 아니야?“
다행히 그 날은 아무 일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헤어지며 명동에서 슬레이트 아래로 떨어진 어벙이 친구가 말한다.
”야, 우리는 말이야. 우리 애들이 그 어떤 사고를 쳐도 야단칠 자격이 없는 거 잘 알지?
너희들, 애들 많이 사랑해라. 옛날의 우리에 비하면 하늘이다 하늘...“
요즘도 명동성당에 일이 있어서 가면, 그 골목 그 식당자리 앞을 지나며 혼자 중얼거린다.
“아, 그리운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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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만남의 방이 묵상과 기도의 글이 주가 되어야 하지만, 요즘 기분도 그렇고
가끔은 옛날 추억을 서로 나누고 싶어 잡문을 올렸습니다. 70/80 학번 세대 파이팅!
신부님, 그리고 관리자님... 이해하여 주소서....
엊저녁 급히 글을 올려 아침에 약간 수정해 올렸습니다. 가끔은 신세대 문화에 눌려 지내지 말고
그 옛날 그리운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