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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된다니까, 그래!” --- 강길웅 신부님의 추억 --

작성자  |nittany 작성일  |2009.01.30 조회수  |1695

 


안 된다니까, 그래!”    

내가 대전 사범학교에 다닐 때 학교 후문 근처에 있는 빵집아저씨의 별명이 “안 된다니까,그래” 였다. 가난한 젊은 부부가 작은 판자집에서 찐빵과 도넛을 만들어 파셨는데 맛이 아주 좋았으며 값도 쌌기 때문에 학생들이 떼지어 몰려 들곤 했었다. 다만, “외상은 절대사절‘이라는 주인 아저시의 고집이 우리를 자주 슬프게 했다.


  친구라는 것이 그랬다. 저쪽에서 빵을 샀으면 이쪽에서도  한 번쯤 내야 하는데 나는 돈이 없어 늘 얻어먹기만 하려니까 창피하고 비굴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몇 번 외상을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으며 소용이 없었다. 그때 주인아저씨가 늘 하시던 대답이 “안된다니까, 그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저씨의 그 대답이 고마울 때도 있었다. 사실 외상을 먹는다 해도 갚을 능력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 정도만 해도 친구들에게 인사치레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그때 동생의 병 때문에 빚이 많았었다. 용돈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내가 하도 불쌍하게 보였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송곳 하나 들어갈 틈이 없던 아저씨가 자청해서 외상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그래서 그 날은 “펑!” 소리가 나도록 친구들에게 겁 없이 쓰면서 실컷 먹었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외상을 먹어 본 사람은 다 경험한 일이지만, 먹을 때야 신이 나고 재미있지만 막상 갚을 때가 되면 생돈을 버리는 것처럼 아까운 것이 또 외상 이었다. 더구나 돈이 마련되지 못할 땐 주인을 피해 다녀야 하기 때문에 나는 학교를 정문이나 후문으로는 감히 다닐 엄두도 못 내고 철조망 신세를 자주 져야만 했었다. 왜냐하면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정문과 후문을 딱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상 빚을 갚을 돈 마련은 항상 막연했다. 부모님이 무슨 용돈을 주시는 것이 아니기에 어디서 생겨날 구멍이 없었고, 방학이면 가금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기도 하지만 겨우 몇 푼 타 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조그만 철물점을 하시는 할아버지의 돈통에서 돈을 훔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나는 사실 청소년 시절부터 전과가 많았다. 수업시간에 남의 도시락을 까먹는 일은 다반사였고 친구들의 콘사이스를 빼내어 팔기도 했으며 학교의 수도꼭지도 비틀어지기만 하면 풀어다가 돈을 만들곤 했었다. 그러다가 3학년 때는 술집에서 학생과장을 만나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때 아버지께서는 그 학교의 선생이었는데도 나는 그처럼 구제불능 이었다.


  좌우간 그 뒤로 외상을 몇 번이나 더 먹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꽤 신용을 지키다가는 졸업 말기에 외상을 크게 한 번 걸어 놓고는 그대로 떼어먹고 말았다. 그때는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빵집아저씨에 대한 일종의 보복이었다. 그놈의 외상 때문에 굽실거리고 자존심 상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이상의 것이라 해도 분이 안 풀렸을 것이다.


  졸업을 하자 나는 섬마을 학교로 지원하여 충남 당진군에 있는 ‘대난지도’ 라는 서해안의 작은 섬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 후 학생시절의 ‘외상’ 문제 따위는 까맣게 잊고 새로운 세계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섬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참으로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또 선생이 동네 유지(?)여서 가끔 정중한 초대를 받곤 했다.


 마을에서 초대가 오면, 먹을 것이 항상 부족했던 나로서는 돈 안들이고 실컷 마시고 배 터지게 먹는 기회가 되었다. 시골에서는 생신, 회갑, 돌, 제사 등이 줄을 잇고 있었으며 모내기나 추수 때 등 술 마실 일들이 많아서 그때마다 선생은 귀빈으로 초청되어 안방에서 큰상을 대접받곤 했었다. 그때는 이장이 제일 높았으나 선생 끗발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그때의 식사 정량이 밥 두 사발에 국 세그릇, 그리고 막걸리 한 주전자였다. 나는 매끼마다 그렇게 먹었으며 그때의 밥 주발은 안에 담긴 것보다도 위로 올라앉은 양이 더 많았던 시대였다. 그리고 공밥이나 공술이 없는 날은 굶을 수 있는데까지 굶으며 지냈다. 자취 쌀이 늘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섬마을 선생 3년을 하자 군에 입대하는 문제가 생겼으며 바로 그 시기부터 섬마을 선생을 우대하는 교육정책에 따라 나는 운 좋게 대전시로 전입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큰 행운이었다. 대전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었다. 시골에서 적어도 10년은 고생해야 내신을 낼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전으로 발령받고 얼마 후의 일이다.


  그때 사범학교 정문 쪽으로는 부속초등학교가 있었고 후문 쪽으로는 서대전초등학교가 있었다. 나는 바로 서대전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묘하게도 모교로 발령을 받아 내가 졸업할 때 계셨던 선생님들과 함께 2학년 담임을 하게 되었다.


 학기 초였다. 하루는 오전 수업을 끝내고 가정방문을 하는데 평소에 유독 나를 따르던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동행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일부러 다른 아이들의 집부터 먼저 돌고 맨 나중으로 아꼈던(?) 그 아이의 집을 찾았는데 그 아이가 “아버지!” 하고 집으로 달려가서 끌고 나온 사람은 다름아닌, “안 된다니가, 그래” 바로 그 아저씨였다!


 “워어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그 때 내 상황이 바로 그랬다. 나도 당황했지만 그 분은 나보다 더 당황했다. 집이 그 쪽이 아니었는데 그동안에 아마 이사를 한 모양이었다. 간신히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저시, 외상값 안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아저씨가 죄송하다는 듯이 머리를 숙였다.

 “선생님, 저도 이젠 빵 장사 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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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강길웅 신부님의 어려웠던 학창 시절 이야기라고 합니다. 참으로 강론 말씀으로도 유명하신 신부님이시지만 대단한 학창시절을 보내신 듯.. 술집에서 학생과장 만난것은 이해가 가지만 친구 영어사전과 학교 수도꼭지 빼서 내다 판 것은 대단한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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