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해를 보내며...
“신부님, 이렇게 태평양 건너편에서 신부님과 같이 앉아 있게 될 줄 정말 생각도
못 했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그렇지? 나도 그래”
높은 하늘과 짙푸른 바다,
백사장 따라 끝없이 펼쳐진 로돈도 비치의 겨울바다가
신부님과의 오랜만의 재회를 더 눈부시게 만든다.
“어서 와인 한잔 해. 이렇게 경치 좋은 데서는 한잔 해야지”
내가 술을 마시면 자연히 다른 사람이 운전을 하게 될 걸 아시고
먼저 마시라고 자꾸 권하신다.
딸아이가 이곳에 혼자 머무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신다며
내가 한국으로 떠난 후에도 딸애 학교 근처에 오셔서 한국음식을 사주시는 신부님.
.......
"신부님, 저 밑에 와 있는 데요"
"그래, 나 본당에 있어, 올라와"
"같이 묵상부터 해야지"
묵상 후 주모경을 같이 바치고 나서 나와 딸애 머리에 강복해 주신다.
"너 미술 전공할거라 그랬지?"
"너 이 성당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했던 건축가 김수근씨가 설계한 성당인거
모르지? 그 건축가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우리 옛날 한옥동네 골목을 생각하며 설계한 건물이야" 하시며 성당의 뒷골목까지 구석구석을 데리고 다니시며 보여 주신다.
떠날 무렵 갑자기 지갑에서 무엇인가를 한참을 찾으신다.
그리고는 쓰시던 묵주와 꼬깃꼬깃 접은 백 불짜리 지폐 한장을 딸 손에 쥐어 주신다.
"신부님! 외국에서 비상금으로 가지고 다니시는 걸 왜 그러세요.
돈은 절대로 안 됩니다"
"아니 왜 그래, 내가 주고 싶어서 그러는데. 이것도 못 주나?"
할 수없이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자꾸 마음이 저려온다.
......
한 해를 넘기려 해서 그런지 강바람이 더 매섭게 느껴지는 밤이다.
핸드폰 진동 소리가 나며 램프에 옅은 불빛이 들어온다.
오후에 전화를 드렸던 신부님이다.
식당을 빠져나와 전화를 받는다.
"아, 신부님 아까 낮에 전화드렸었는데, 안녕하셨죠?”
"나야 항상 똑같지. 그동안 다들 잘 지냈지?"
"기도해 주시는 덕분에 저희는 잘 지냅니다. 신부님, 자주 못 찾아뵈어서 죄송해요.
다름이 아니라 올해가 가기 전에 저희가 찾아가 뵙고 저녁이라도 할 가해서요.
근대 너무 갑자기 전화 드렸죠?"
"왜 이리 바쁜 연말에 굳이 오려고 해,
내년 초에 천천히 와도 돼, 괜찮아"
사실 해를 넘기기 전에 내 마음 편하자고
신부님께 앞뒤 안 가리고 갑자기 전화를 드린 것이다.
그러나 "난 괜찮아, 괜찮아" 하시며 항상 이해해 주시며, 기다려 주시는 신부님.
그 동안 여러 본당을 다니시며 나 같은 신자 때문에
마음이 이미 다 너덜너덜 해지셨을 당신.
못난 자녀들이 세상사에 휩쓸리다
언젠가 회심의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난 괜찮다 하시는 당신.
저희 때문에 행여 남아 있던 모서리마저 다 달아
어느새 반들반들 빛나는 옥구슬이 된 당신의 마음.
올해 마지막 밤,
옥구슬이 부서져 옥토(玉土)가 되어 버린 당신께 말씀드린다.
신부님, 올해도 건강하세요.
그리고 용서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