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해가 뜨자 타버려 뿌리도 붙이지 못한 채 말랐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마태 13,3-8)
예수님의 유명한 「씨 뿌리는 농부에 관한 비유」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할 점은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파종법이 현재 우리나라의 파종법과 달리 쟁기로 갈지도 않고 곡물 씨앗을 뚜껑이 없는 바구니나 나귀 등에 매단 주머니에 담아 밭으로 가져가서 손으로 직접 그냥 씨를 뿌렸다. 또한 당시 이스라엘 밭에는 길이 따로 없는 곳이 많았고, 4월 추수 후부터 10월 파종기까지 묵혀두기에 사람들이 밭 사이로 지나다녀 길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 수가 많아지다 보면 자연히 조그만 길이 밭에 나기도 했다. 또 농부들이 밭갈이를 할 때 길이 나 있으면 굳이 그곳을 갈아엎지 않고 그냥 내버려둘 때가 많았기 때문에 길바닥에 씨가 떨어져도 농부가 흙으로 덮어주지 않으면 새가 와서 쪼아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은 농토가 부족했기 때문에 농사가 가능한 곳은 어디든지 밭으로 개간하였지만 돌이 많아서 그대로 내버려둘 경우에는 파종이나 쟁기질이 불가능할 정도였다(마태 13,5-6 참조)고 한다. 특별히 돌이 많아서 경작을 하기 어려운 밭이 있으면 곡식 농사를 포기하고 거친 땅에서도 잘 자라는 포도나무를 심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관개(灌漑)에 의하지 않는 주로 자연적 영농 방법을 사용하였다. 때문에 물의 경우에는 전적으로 강우에 의존하여야 했는데, 하지만 강우는 주로 겨울철에 집중되는 상황에서 농사를 짓기에는 항상 물이 부족하였다. 특히 여러 해에 걸친 한발과 기근으로 곤궁기가 빈번히 발생했던 당시에는 물은 어느 곳에서나 귀한 상태였고 따라서 비는 꿀보다도 달콤한, 어떻게 보면 하늘에서 보내온 축복이었다. 즉 팔레스타인 땅은 일 년 내내 하느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리더라도 겉은 흙으로 덮여 있고 속에는 돌이 많이 박혀있는 곳도 많았고, 땅 속에 가시나무 잔뿌리가 남아 있는 경우가 있어서 씨앗이 제대로 자랄 수 없는 곳 또한 많았다. 따라서 보통 농부가 뿌린 씨앗 중 2ㆍ30%만이라도 그 결실을 수확할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이러한 상황아래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마음 자세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길가와 돌밭 그리고 가시덤불과 같은 박토(薄土, 즉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마음)에 떨어진 씨앗(말씀)은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옥토(沃土, 즉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마음)에 떨어진 씨앗(말씀)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길가와 돌밭 그리고 가시덤불 같은 박토(薄土)와 좋은 땅인 옥토(沃土)에 대한 언급은 『성경』 속에도 보인다.
"그들은 성읍들을 부수고 병사들마다 모든 옥토에 돌을 던져 그곳을 돌로 가득 채웠으며, 물이 솟는 샘을 모두 틀어막고 좋은 나무들을 모조리 쓰러뜨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키르 하레셋에 돌담만 남게 되었는데, 그곳마저 투석병들이 포위하고 공격하였다."(2열왕 3,25)
"하느님은 외로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사로잡힌 이들을 행복으로 이끌어 내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반항자들은 불모지에 머무른다. 하느님, 당신께서 당신 백성에 앞서 나아가실 제 당신께서 사막을 행진하실 제(셀라), 땅이 뒤흔들리고 하늘마저 물이 되어 쏟아졌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시나이의 그분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당신께서는 넉넉한 비를 뿌리시어 메마른 당신 상속의 땅을 일으켜 세우십니다."(시편 68,7-10)
"내가 보니 땅은 혼돈과 불모요 하늘에는 빛이 사라졌다. 내가 보니 산은 떨고 있고 모든 언덕은 뒤흔들리고 있다. 내가 보니 사람도 없고 하늘의 새들도 모두 달아나 버렸다. 내가 보니 옥토는 황무지가 되고 모든 성읍은 허물어졌다. 주님 앞에서 주님의 타오르는 분노 앞에서 그렇게 되었다."(예레 4,23-26)
여기서처럼, 박토(薄土)와 옥토(沃土)는, 하느님에 의해서도 인위적으로 나뀔 수 있다. 또한 "하느님, 당신께서는 넉넉한 비를 뿌리시어 메마른 당신 상속의 땅을 일으켜 세우십니다."(시편 68,7-10)에서와 같이 194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태생의 영국 시인 T. S. 엘리어트는 그의 대표작 〈황무지 The Waste Land〉(1922)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신앙조차 잃어버린 체 정신적 황폐에 빠진 당시 유럽인을 그저 하루하루를 소비하기만 하는 모습으로 그리면서, 마지막에 황무지에 조만간 단비가 내릴 것이라는 암시를 우렛소리로 표현하고 있는데, 작자는 이를 통해 절망의 밑바닥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트게 됨을 암시하고 있다. 즉 황무지 박토에는 비와 같은 예수님의 은총이 필요조건이지만, 우리는 무작정 예수님의 은총을 기다리기 보다는 자기 스스로가 먼저 예수님의 은총이나 말씀을 받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길가와 돌밭 그리고 가시덤불과 같은 박토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오래 보존하지 못하고 오히려 소멸되도록 방치한다. 하지만 자갈돌이나 가시덤불이 많은 박토라고 해서 항상 박토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나일강의 범람으로 농작물이 잘 자랄 수 있는 영양분이 풍부한 좋은 땅인 옥토로 변하는 것처럼 바뀔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기적)에 의해 것이다. 박토라 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충만할 때 옥토가 될 수 있고, 옥토라 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단지 교회에 나가는 것과 같은 소극적 행동에 머무를 때에는 언제라도 박토가 될 수 있다.
옥토가 되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옥토란 먼저 자기 자신부터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교회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 속에서 그 분의 현존을 느끼고, 나아가 그 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항시 간직하면서, 그 마음을 이웃사랑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내 자신이 옥토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열정과 그 분에 대한 믿음 그리고 유혹에서의 승리를 통해 우리의 마음은 박토에서 옥토로 변하고, 다시 그 옥토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풍성한 결실로 표징될 것이다.
모든 분들의 마음이 모두 옥토 되시기를 주님께 기원합니다.